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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 22

BOOK&LIFE

[SIDE B] 일화기억, 우리 마음에 기록 남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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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화기억, 우리 마음에 기록 남기기 

 

임현규

심리학도, 《만만한 심리학개론》 저자

 

 

Emotion Icon북&라이프 side B <책과 심리학 >은 국문학과 심리학을 전공한 작가가  

학문 세계의 전문적 지식을 모든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게 전달하는 책과 심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매 호 독자들을 만나러 옵니다.

 

 


지난 2년간 잡히지 않았던 연말 모임이 올해는 다시 잡히고 있다. 코로나 거리두기가 한창이었던 때에서 조금 벗어나서 이제는 서로 얼굴을 맞대고 회포를 풀려는 마음들이다. 하지만 다시 만나서 작년이나 올해 있었던 일을 주로 얘기할 것 같지는 않다. 예를 들어, 동창 모임이라면 우리는 잠깐 안부를 나눈 후에 학교에 같이 다니던 시절의 얘기를 또 꺼낼 것이다. 그 전 모임에서도 그리고 그 전전 모임에서도 나누었던 추억들, 하지만 서로의 기억 속에서 여전히 생생한 그 얘기들 말이다.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도 술잔을 기울이며 ‘왕년에 잘나가던 시절’ 이야기를 하신다. 그때 모두가 잘나가셨을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누구나 장노년 시절의 일보다는 청년 시절의 일을 더 많이 기억하고, 그래서 그게 ‘자기’를 규정하는 서사가 된다. 그러니 그걸 조금 긍정적으로 회상한다고 해서 나무랄 수는 없다. 


우리 기억의 밀도는 청년 시절에 더 높다. 마흔 살이었던 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떠올려 보라고 한다면 몇 가지 꼽기 어렵겠지만, 스무 살이었던 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떠올려 보라고 하면 훨씬 많은 것들을 떠올릴 것이다. 이 현상에 대해서 저명한 미국의 신경과학자는 이렇게 말한다.

 


일화기억을 형성하는 사건들은 대개 15세에서 30세 사이에 모여 있다.

이때가 우리 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들이 집중되는 회고절정(reminiscence bump)의 시기이다.

왜 그럴까? 확실하지는 않지만, 대다수 과학자는

첫 키스, 첫사랑, 첫 자동차, 첫 대학 생활, 첫 성 경험, 첫 직업, 첫 집, 첫 결혼, 첫아이 등

다양한 방면에서 첫 경험을 가장 많이 하는 시기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 시기에 인생은 목표와 의미로 채워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여기서도 뇌는 의미 있는 것들만 기억한다.

 

- 리사 제노바(Lisa Genova), 《기억의 뇌과학》중 -


 

여기서 ‘일화기억(episodic memory)’이란 명시적 기억의 하나로, 우리가 경험한 것에 대한 기억을 말한다. 명시적 기억은 크게 의미기억과 일화기억으로 나뉜다. 의미기억은 사실과 정보에 대한 기억으로 “대한민국의 수도는 서울이다.”, “2002년에 한일월드컵이 열렸다” 같은 것들이다. 한편 일화기억은 “2002년에서 서울 시청 앞에서 정신없이 응원하다가 집에 갈 때야 지갑을 잃어버린 걸 알아차렸다” 같은 것이다. 의미기억을 떠올릴 때와 달리 일화기억을 떠올릴 때 우리는 그때의 감각과 감정을 다시 느끼기도 한다. 그래서 일화기억 회상이란 일종의 시간여행이라고 묘사하는 학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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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 번째 키스는 기억하면서 왜 열 번째 키스는 기억하지 못할까?


 

일화기억은 자동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우리의 모든 일상 경험이 일화기억이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지난주 목요일 점심때 먹었던 반찬을 떠올려 보라고 하면 기억하지 못할 사람이 대부분인 것처럼 특별할 것이 없는 반복적인 일상은 우리 뇌에 장기기억으로 남지 않는다. 뇌는 그렇게 한가하지 않다. 주의를 기울여 처리해야만 장기기억에 남을 수 있다. 그런데 아주 특별하고 인상적인 경험이라면 주의를 기울이려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집중하게 되고 기억에 남을 것이다. 우리 삶에 특별한 일이 그렇게 자주 일어난다면 좋겠지만 대개는 그렇지 않다.


연말을 맞아 올해를 되돌아보자. 과연 스무 살 때처럼 많은 의미 있는 일들이 있었을까? 특별한 일도 없었고, 신나는 일도 없어서 별로 생각나는 것이 없다고? 어쩌면 꽤 의미 있는 일이 있었는데도 바쁜 일상에 치여서 주의를 기울이지 못한 탓에 지나쳐 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꼭 객관적으로 대단한 일만 명료한 기억으로 남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면 그게 곧 특별해진다. 기억술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방법이 의미를 부여하는 방법인 것처럼 우리의 경험에도 의미를 부여하면 기억에 남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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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2년에 한일월드컵이 열렸다.'는 의미기억이다. '응원을 하다 지갑을 잃어 버린 것을 알았다.'는 일화기억이다.

 

연말연시를 맞아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작게라도 의미 있는 경험을 해보는 건 어떨까? 그게 몇 년 후, 몇십 년 후에도 함께 떠올릴 수 있는 일화기억으로 남을지 모른다. 의미가 기억을 만들고, 그 기억이 다시 우리 삶에 의미를 부여할 것이다. 평소에 가족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잘 하지 않았던 사람이라면 이번에 “사랑한다”라고 직접 말로 표현해보는 것은 어떨까? 평소에 그런 표현을 하지 않았다면 더욱 특별한 일이 될 것이다.


그렇게 모두 마음속에 나름의 기록을 남길 수 있는 뜻깊은 연말연시가 되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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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현규

심리학도, 《만만한 심리학개론》 저자

 

연세대학교 문과대학에서 심리학과 국어국문학을 전공했으며, 

동 대학원 인지과학협동과정에서 인지심리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학문 세계의 지식을 대중이 이해하기 쉽게 전달하는 데 힘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