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 22
INSIDE[오늘의 헌책] 뿌리 깊은 나무, 샘이 깊은 물
오늘의 헌책 : 기록
미처 발견하지 못한 채 서울책보고 서가 한구석에 오랫동안 숨어있던 헌책,
그 쓸모와 오늘의 트렌드를 연결하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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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 깊은 나무, 샘이 깊은 물
<샘이 깊은 물> 일천구백팔십오년 구월호, 뿌리깊은나무
한국 잡지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두 개의 잡지가 있다면 아마 <뿌리 깊은 나무>와 <샘이 깊은 물>일 거예요. ‘뿌리 깊은 나무’라고 하면 누군가는 배우 한석규와 장혁, 신세경이 출연한 2011년작 드라마를 떠올릴 수도 있지만요. 잡지 <뿌리 깊은 나무>는 1976년에 창간한 종합교양지로 한국 고유의 문화를 새로운 편집에 담아 주제와 디자인 면에서 한국 잡지의 새로운 장을 연 잡지라고 볼 수 있어요. 1980년 신군부에 의해 폐간될 때까지 모두 52권의 잡지가 발행되었답니다.
그 <뿌리 깊은 나무>의 자매지 격인 <샘이 깊은 물>은 1984년 11월부터 2001년 11월까지 역시 품격 있는 문화 잡지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고 해요. 저희 서울책보고에도 <뿌리 깊은 나무>를 찾는 헌책 마니아 분들이 많으신데요. 영인본이든 단권이든 서울책보고에 입고하면 며칠 사이에 바로 찾아가신답니다. 그런데 아직 <샘이 깊은 물>의 존재를 잘 모르시는 것 같아서 이번 ‘오늘의 헌책’에 가져와 봤습니다. 이 잡지 또한 #기록 의 의미에 잘 부합하는 잡지 중 한 권이기 때문이죠! 과연 이 잡지는 누구의 어떤 삶을 기록했을까요?
당시 <샘이 깊은 물>의 앞표지는 파격적이었어요. 평범한 일반(!) 여성을 앞표지에 내세웠기 때문이죠. 메이크업하지 않은 자연스러운 얼굴과 표정은 오히려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어요. 30여년이 지난 지금도 뭔가 자꾸 눈길이 가지 않나요? 표지에서 볼 수 있듯 <샘이 깊은 물>은 동시대 여성들의 라이프스타일을 기록으로 남겨두었습니다. 표지 인물은 누구인지 한 번 같이 볼까요?
표지 인물인 홍성주 씨는 무려 (잡지 발행 연도 기준) 지난해 2월에 대학을 졸업한 다음 3월에 결혼하고, 올해 4월에 자녀를 출산했습니다. 1980년대 초중반의 문화 속에서 여성들은 대학을 졸업하고 20대 중반이 채 되기도 전에 결혼했던 것일까요? 거기에 토목 기사인 남편은 올해 정월에 사우디로 떠나셨다고 합니다. (!!!) 그래서 4월에 자녀를 출산할 때 혼자였다는 이야기가 조금은 놀랍기도 한데 홍성주 씨는 단단한 표정으로 잡지의 표지를 채우고 있네요. 표지 인물 소개에 담긴 짧은 글에서도 당시 문화를 살짝 들여다볼 수 있었습니다.
목차만 살펴봐도 잡지 콘텐츠가 남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이런 음식 한 가지
잘 입은 한복
잘 입은 양장
볼 만한 집치레
등등. 주로 당시 여성들이 만들고, 입었고, 꾸몄던 삶의 내용이 잡지에 담겨 있습니다. 하나하나 사진 중심으로 살펴볼까요?
이런 음식 한 가지_섭산적
잘 입은 한복_박씨 부인의 추석빔
잘 입은 양장_이은주 씨의 초가을 정장
불 만한 집치레_사 정숙 씨집의 바느질방
화보 중심으로 여성의 라이프스타일을 살펴보는 콘텐츠 외에도 여성의 삶을 르포르타주 형식으로 기록한 소설가와 기자의 글도 있습니다.
여자가 움직이는 농촌, 윤정모/소설가
지리산에서 만난 여자, 최화수/부산일보 문화부 기자
<샘이 깊은 물> 편집장님이 직접 취재한 소중한 기록도 있습니다. 암 선고를 받은 노년 여성 “할머니” 최을경 씨 이야기입니다. “싸늘하게 탈속한 사람이 아니라 사는 데에 전력투구한다는 것이 얼마나 고달픈 일인지를 아는 사람”의 이야기라뇨. 1980년대 중반을 묵묵히 자기만의 리듬으로 건너가는 무명의 노년 여성 이야기가 잡지에 실려있다는 건, <샘이 깊은 물>이라는 잡지가 가진 격을 보여줍니다.
평생토록 못 잊을 일을 가진 여성을 만나는 기쁨도 있습니다.
“내가 좋아 잘 그리는 게 한 이십 가진데,
우선 사군자가 있고, 매, 난, 국, 죽이죠.
목련, 능수화, 백합 또 등나무도 있고,
모란, 연, 장미, 소나무, 버들, 개나리, 이렇게 꽃을 많이 그리죠.
산수도 좀 하고. 그림이 잘 나왔다 싶을려면 생동도 있고
획이 말라도 안 되고 단단하면서 운치도 있고 그래야죠.
나는 밤에는 안 그려요.
대개 아침절에 한두 시간 그리고 나면 개운하죠.
오늘 일을 다 했다 싶기도 하구.”
숨은 한학자이자 서화가인 오귀숙 선생님 이야기도 <샘이 깊은 물> 같은 잡지가 아니라면 누가 기록해두었을까요?
<샘이 깊은 물>을 만든 한창기 발행인은 원래 한국브리태니커회사의 창업자입니다. 잡지에 실린 이런 광고가 낯설지만은 않습니다. 바로 브리태니커 판소리, 팔도소리 시리즈! ‘브리태니커’라는 이국적인 출판사 이름과 ‘판소리’ 혹은 ‘팔도소리’ 시리즈의 조합이 참신합니다. “한국의 자랑 정 경화 부인이 먼 데서나마 꼭 보고 듣는 한국의 땅과 소리”라는 광고 문구도 흥미롭습니다. 무엇보다 <뿌리 깊은 나무>와 <샘이 깊은 물>로 구현한 한창기 발행인의 전통문화 사랑도 놀랍고요.
편집위원과 편집자에 더해 미술 편집위원과 사진 편집위원이 따로 있을 정도로 기사뿐 아니라 디자인과 사진에도 진심이었던 <샘이 깊은 물>. 사진 편집위원에 보이는, 한국 다큐사진계의 대가 강운구 선생님 이름도 반갑습니다.
1970년대부터 80년대를 지나 90년대까지, 우리의 전통 문화와 일상인들의 삶을 기록한 이런 잡지가 있다는 것이 문득 고맙게 느껴집니다. 이런 기록물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이 땅에 살아온 사람들이 가꿔온 문화와 삶의 이야기를 쉽게 잊어버리고 말았을 테니까요.
섬네일 : 드라마<뿌리 깊은 나무>(2011) © SBS방송 홈페이지 https://programs.sbs.co.kr/drama/rootedtree/about/53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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