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Vol. 21

BOOK&LIFE

[SIDE A] 잡지와 시대 감수성: 1990년대 〈녹색평론〉과 한국 생태학 담론의 기틀

리스트 허희.jpg

 

잡지와 시대 감수성: 

1990년대 〈녹색평론〉과 한국 생태학 담론의 기틀  


 

허희

문학평론가

 



 

기후 위기를 비롯하여 생태계 파괴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목소리가 이곳저곳에서 들린다. 과거에는 ‘환경을 보호하자’ 정도로 가볍게 논의되던 주제였다. 당시 영어권에서는 환경론(environmentalism)이라는 용어가 널리 쓰였다. 여기에는 인간의 생존에 자연이 영향을 끼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하지만 환경론에 내포된 인간과 자연의 선후 관계는 뚜렷하다. 환경을 보호해야 한다는 말에는, 인간이 자연에 앞선다는 인식이 전제되어 있다. 그러다 환경론을 대체하는 생태학(ecology)이라는 용어가 대두하기 시작하였다. 생태학은 인간이 자연에 앞선다는 논리 대신, 인간 또한 자연 메커니즘의 일부라는 입장에 바탕에 둔 개념이다. 환경론에서 생태학 담론으로 이행하는 데 한국에서는 1991년 창간된 잡지 〈녹색평론〉의 역할이 지대하였다. 

 


KakaoTalk_20221210_152121924.jpg

〈녹색평론〉90호, (공씨책방, 2,000원) 

 

 

"때때로 인간과 자연의 동시적인 해방에 관한 언급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맑스주의는 일반적으로 인간의 삶을 생산과 소비의 측면에 제한하여 본다는 점에서는

 부르주아 철학과 궤를 같이해왔다고 할 수 있다. 

(……) 생산과 소비의 양적 증가는 도리어 인간 생활을 비참하게 만들어버린다는

 비극적인 경험을 겸허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바로 오늘의 현실인 것이다. (……)

 우리와 우리의 자식들이 살아남고,

살아남을 뿐 아니라 진실로 사람다운 삶을 누릴 수 있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협동적인 공동체를 만들고,

상부상조의 관계를 회복하고,

하늘과 땅의 이치에 따르는 농업 중심의 경제생활을 창조적으로 복구하는 것과 같은

 생태학적으로 건강한 생활을 조직하는 일밖에 다른 선택이 없다.”

 

(김종철, <창간사: 생명의 문화를 위하여>, 《녹색평론선집 1》, 녹색평론사, 1993(2008 개정판), 20~21쪽.)


 

〈녹색평론〉을 만든 김종철은 창간사에서 위와 같이 썼다. 그는 1990년대 초입에서 생태학적 위기를 거론한다. 김종철만 그러지는 않았다. ‘생태학‧미래학‧문학’ 특집(《외국문학》 1990년 겨울호), ‘생태계의 위기와 민족민주운동의 사상’ 좌담(〈창작과비평〉 1990년 겨울호) 등에서 알 수 있듯이, 잡지를 출간하면서 사회적 발언권을 확보하였던 한국 지성계는 1990년대 생태학에 주된 관심을 기울였다. 역사적 전환이라 불릴 만한 사건이 발생하였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87년 체제 수립 뒤 민주화운동 세력의 방향 탐색 및 소련의 현실 사회주의 붕괴를 예로 들 수 있다. 〈녹색평론〉 창간사는 1980년대가 드리운 빛과 그림자를 검토하는 방식으로 쓰였다. 

 

 

김종철은 한국 경제의 양적 성장에 취한 사람들을 향하여 엄중히 경고한다. “생산과 소비의 양적 증가는 도리어 인간 생활을 비참하게 만들어버린다는 비극적인 경험을 겸허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바로 오늘의 현실”이라고. 그러면서 나르시시즘에 빠져 자기 외부의 존재에 대해서는 무심한 시대적 풍조를 타개하는 방안으로 생태학을 언급한다. 그렇다고 1980년대 저항 이데올로기로 기능하던 마르크스주의의 위상을 전면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때때로 인간과 자연의 동시적인 해방에 관한 언급이 없었던 것은 아니”라고 마르크스주의에 생태학적 요소가 반영됨을 짚어낸다. 물론 이를 감안하더라도 1980년대 한국에서 작동하던 마르크스주의가 생태학에 비중을 두고 있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그것은 분명 생태학보다는 사회변혁 운동의 핵심 동인으로 작용하였다. 

 

게다가 김종철에 따르면 “맑스주의는 일반적으로 인간의 삶을 생산과 소비의 측면에 제한하여 본다는 점에서는 부르주아 철학과 궤를 같이해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연유에서 그는 생태학으로의 전회를 요구한 것이다. 이것은 1990년대 들어 세계사적 패권을 장악한 자본주의의 승리를 그대로 용인해서는 곤란하다는 태도와 결부된다. 소련 해체가 예증하는 ‘역사의 종언’(프랜시스 후쿠야마) 이후가 결코 순조롭게 전개되지는 않으리라. 실제 우리는 역사의 퇴보를 여러 가지 형태로 목격한 바 있다. 가령 자본주의는 생태학적 문제에 관하여 명쾌한 답을 내놓기 어렵다. 자본주의는 윤리성과 거리가 먼 도구적 기술에 의존하는 자유주의와 연계하여 경제 성장에 몰두하기 때문이다. 〈녹색평론〉을 꾸준히 펴내면서 김종철은 바로 거기에 대응하려고 애썼다. 

 

 

KakaoTalk_20221210_145049652.jpg

▶ 잡지 〈녹색평론〉은 환경론에서 생태학 담론으로 이행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사진은 서울책보고 판매 서가의 〈녹색평론〉(공씨책방, 각권 2,000원) 

 

 

한편으로 이와 연결 지어 볼 수 있는 논쟁이 ‘근대문학 종언’이다. 일본 문예비평가 가라타니 고진이 설파한 근대문학이 사실상 끝났다는 주장은 2000년대 중반 한국 문단을 한바탕 휩쓸었다. 해당 강연에서 그는 문학평론가로 활동하다 〈녹색평론〉을 창간한 김종철을 거명하였다. 

 

“김종철이라는 고명한 문학비평가는 문학을 그만두고 생태운동을 시작하며,

〈녹색평론〉이라는 잡지를 내고 있습니다. 

(……) 나는 왜 문학을 그만두었는가를 물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문학을 했던 것은 문학이 정치적 문제에서 개인적 문제까지 온갖 것을 떠맡는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해결할 수 없을 것 같은 모순조차도 떠맡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인데,

언제부터인가 문학이 협소한 범위로 한정되어 버렸다,

그런 것이 문학이라면 내게는 필요가 없다,

때문에 그만두었다는 것입니다.”

 

(가라타니 고진, 조영일 옮김, 《근대문학의 종언》, 도서출판b, 2006, 49쪽.)

 

 

복잡한 상념에 빠지게 만드는 구절이다. 그의 말대로 근대문학의 유효 기간이 지났다고 하자. 그래도 문학잡지는 계속 나오고, 여전히 나도 문학을 붙들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문학(잡지)의 존재론을 어떻게 다시 설정해야 하는가를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에 관해서는 따로 논할 지면이 있을 듯하다. 다만 앞으로 문학이 어떤 식으로 진화하든 생태학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고리를 맺을 거라는 예상은 충분히 할 수 있다. 출판계에서 열렬한 호응을 얻은 정세랑의 소설이 명징한 사례이다. 그녀의 작품에는 인간을 위한 환경보호라는 환경주의를 넘어, 생태학에 기초한 공생적 관계론이 펼쳐진다. 좋은 소설을 집필한 작가와 작품에 공명하는 눈 밝은 독자의 탄생은 우연이 아니다. 1990년대부터 이어진 〈녹색평론〉의 의지가 스며 있다.

 

 

 

 

 

허희 프로필.jpg

허희

문학평론가

 

대학과 대학원에서 문학을 공부했다. 

2012년 계간 <세계의 문학> 신인상 평론 부문에 당선되어 문학평론가로 활동을 시작했다. 

문학에 관련된 글을 쓰고, TV와 라디오 등에 출연해 문화 전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살고 있다. 

비평집 시차의 영도와 산문집 희미한 희망의 나날들을 냈다. 

계간 문예지 <아시아>, 월간 문화전문지 <쿨투라> 기획위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