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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 20

BOOK&LIFE

[SIDE A] 식물을 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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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을 읽다

 

임이랑

작가, 뮤지션

 

 

어느덧 가을도 절반은 지나간 기분이다. ‘시간이 참 빠르다’라는 말을 아무리 여러 번 반복해봐도 그 속도가 흘러가는 시간보다 느려서 금방 다시 내뱉게 된다. 이제 금방 오색찬란하게 빛날 낙엽의 날들에 가닿는다. 며칠간 빨갛게 노랗게 이파리가 흘러내리고 나면 우리는 정말로 겨울에 도착할 것이다. 언제 시작했는지도 모르게 사라지는 좋은 계절의 시간이 아까워서 괜히 하늘을 한 번 바라보고 청량한 공기를 들이마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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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이랑


나는 식물을 곁에 두고 가깝게 지내기 시작하면서 공기와 비에, 면과 색에 더 예민하게 반응하는 사람이 되었다. 어떤 날은 비가 내릴 것 같으니 화분에 물 주기를 하루 쉬어가고, 어떤 날은 해가 맑으니 온 집안 창문을 열고 식물들이 마음껏 광합성을 하며 이파리 근처에 쌓인 산소를 이산화탄소로 교환할 수 있게 돕는다. 내 반려 식물의 조력자로 지내는 시간은 기껍다. 평안한 낮을 보내다 보면 어느덧 식물들은 한 뼘씩 훌쩍 자라고 새로운 이파리를 올리고 꽃이 피고 지며 나의 시간도 건강하게 흐른다.


이파리를 닦기 좋고, 좋은 문장을 읽으면 마음이 한껏 부풀어 오르는 가을. 이 계절에 함께 읽으면 좋을 식물 책 3권을 소개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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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이랑


 

Emotion Icon《정원가의 열두 달

 

카렐 차페크가 쓰고 요제트 차페크가 그림을 그려 완성한 《정원가의 열두 달은 수많은 가드너들의 사랑을 받으며 오래도록 화자 되는 책이다. 누군가 식물 관련 책을 딱 한 권만 읽어야 한다며 추천을 부탁해오면 나는 주저 없이 《정원가의 열두 달을 추천한다. 


‘인간은 손바닥만 한 정원이라도 가져야 한다. 우리가 무엇을 딛고 있는지 알기 위해선 작은 화단 하나는 가꾸며 살아야 한다’라는 글로 시작하는 이 책은 제목 그대로 정원가의 열두 달을 1월부터 12월까지 그려낸 책이다.


100년 전 체코에서 가드닝을 하던 카렐 차페크와 100년 후 서울에서 가드닝을 하는 나의 차이를 비교하다 보면 식물 종의 미세한 차이가 있을지언정 새싹이 피고 흙을 만지는 본질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흐른 시간이 무색할 만큼 시차가 느껴지지 않는다. 


특히 내가 공감한 부분은 카렐 차페크가 알뿌리 식물이라고 불리는 구근을 사 와서 화분 하나하나에 구근을 나누어 심고 이내 구근이 남아서 화분을 더 사와 심다가 흙과 화분이 남아 결국 구근을 더 사 오는 부분이다. 완벽하게 똑 떨어지는 가드닝이란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더 많이 심고 더 충분히 가꾸어 더 많은 꽃을 피우는 가드닝만이 존재한다.


나는 책 속에 담긴 열두 달의 이야기 중 10월의 이야기를 특히 좋아하는데, 가을이 깊어가는 10월을 그저 ‘겨울을 준비하는 달’이 아닌 땅속 깊은 곳에서 싹이 트고 생장하는 새싹을 느끼는 저자의 시선 때문이리라. 저 아래 깊이 숨어 봄을 준비하며 싹눈을 키우는 식물의 역동성을 느껴보자면 차가워지기 시작하는 바람도 더는 매섭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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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이랑

 

 

 

Emotion Icon《정원의 쓸모

 

《정원가의 열두 달을 통해 가드닝의 기쁨과 슬픔, 요모조모의 감정을 읽었다면 다음으로 추천할 책은 《정원의 쓸모이다. 정신과 의사이자 심리치료사인 수 스튜어트 스미스가 30년간 정원을 가꿔온 정원사로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정원이 인간의 마음에 어떻게 도움이 되는지를 과학적, 심리적으로 정의하는 책이다. 


사실 우리는 이미 마음 건강과 정원 가꾸기 사이의 연관성에 대해 어렴풋이 알고 있다. 정원이 주는 성실한 기쁨과 키워내는 마음에 대한 이야기를 익히 접해왔을 뿐만 아니라 아스팔트 사이에 피어난 들풀 하나에 쉽게 감동받곤 하니까. 이렇게 정원과 자연이 사람의 행복과 정신 질환 회복에 도움이 된다는 이론은 18세기 유럽에서부터 조명받아왔다. 저자는 이 두툼한 한 권의 책을 통해 신경과학적이며 심리학적 연구 결과와 실험군을 통해 더욱 적확한 사실을 일깨워준다. 새삼스럽지만,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 학문적이며 권위적인 접근이 필요할 때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러나 학문적이며 권위적인 책이라고 해서 딱딱하거나 이성적이기만 한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내지 않고 내밀한 상처를 이기고자 문밖으로 걸어 나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친절하게 풀어내기에 이 책을 더욱 좋아한다. 


우리는 어째서 더 땅과 가까이 살아야 할까? 수감생활 중 원예 활동을 열심히 한 수감자들의 재수감률이 낮은 이유는 무엇일까? 정원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생명의 기본적 생물학 리듬으로 다시금 돌아갈 수 있는 이유는 왜일까? 흙은 어떤 방식으로 정신의 돌봄을 이뤄낼까? 같은 질문에 정확한 답과 함께 위안을 건네는 수 스튜어트 스미스의 온화한 단단함에 감명받는다. 


저자의 말대로 창조이며 동시에 재창조인 정원을 통해 어떻게 나의 마음을 돌볼 것인지에 대해 다시금 돌아보게 하는 고마운 책이다.

 

 


Emotion Icon《나무의 말

 

스웨덴 국립공원 정상에는 Old Tjikko라는 이름의 나무가 살고 있다. 탄소 연대 측정법으로 알아낸 이 노르웨이산 가문비나무의 나이는 무려 9,550살이 넘는다. 보호를 위해 위치가 정확히 밝혀지지는 않은 이 나무는 빙하시대 말에 뿌리내려 지금까지 살고 있다고 한다. 올드 치코의 삶에 비하면 인간의 삶은 얼마나 종잇장 같은지 생각한다. 그 종잇장 같은 시간 동안 인간이 세상에 가하는 오염을 생각하기 시작하면 이내 마음이 복잡해진다. 


<나무의 말>을 쓴 사진작가 레이첼 서스만은 오랜 시간 전 세계 학자들과 협업하여 아시아, 아메리카, 호주, 유럽은 물론 시베리아와 남극까지 세계를 돌아다니며 2,000살이 넘는 생명체들을 기록했다. 인류가 존재하기 훨씬 전부터 이 땅에 먼저 존재하던 생명체의 이야기가 한없이 매혹적이다.


책에는 차가운 공기 속에 생장하는 올드 치코 뿐 아니라 뜨겁고 건조한 아타카마 사막에서 살아가는 야레타 이야기도 실려있다. 아타카마 사막은 지구상 가장 건조한 땅으로 알려져 인간이 강우량을 측정하기 시작한 이래 비가 단 한 방울도 오지 않은 지역도 있다. 이렇게 건조한 사막의 고지대에서 산과 바다의 안개와 습기로 3000년이 넘도록 살아가는 식물의 강인함이라니! 인간이 저산소증을 겪기 쉬운 고지대에서 인간의 손길에서 벗어나 생존하는 존재라 가능한 것이 아닐까? 


재미있는 점은 야레타가 이렇게 척박한 지역에 적응하고 살아가는 식물이지만 강인하거나 거친 외형을 가진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귀엽고 사랑스러운 쪽이다. 마치 브로콜리 같은 모양으로 군집을 이루어 둥글게 살아가고 있다. 이렇게 아름다운 야레타는 1년에 고작 1센티미터씩 자랄 뿐이지만 밀도가 높고 수분이 없어 불에 잘 탄다는 특징 때문에 연료로 소비되곤 한다. 인간에 의해 생존을 위협받는 또 다른 생명체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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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이랑


 

 

정원을 가꾸는 마음을 읽으며 울고 웃다가, 흙과 이파리가 내 마음에 어떤 작용을 일으키는지를 과학적으로 분석해보고, 이 땅 위에 우리보다 훨씬 오랜 시간을 뿌리내리고 살아온 식물들의 생존 방식을 엿보며 가을을 보낸다. 발아래 떨어진 이파리와 열매를 자연스럽게 어루만지며 이 땅에 연결된 나의 뿌리를 가늠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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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이랑

작가, 뮤지션

 

 밴드 디어클라우드의 베이시스트로 활동하고 있으며

 식물의 이야기를 쓰고, 식물의 사진을 찍고, 식물에 대한 이야기를 말하는 사람.

 저서로는 《아무튼, 식물》과 《조금 괴로운 당신에게 식물을 추천합니다》가 있으며,

 EBS에서 <임이랑의 식물수다>를 진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