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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 20

INSIDE

[오늘의 헌책] 단풍나무과 단풍나무속 은단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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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헌책 : 식집사 시대

 

미처 발견하지 못한 채 서울책보고 서가 한구석에 오랫동안 숨어있던 헌책,

그 쓸모와 오늘의 트렌드를 연결하는 시간

 

 *

단풍나무과 단풍나무속 은단풍 

《한국동식물도감》 제29권 식물편(화분류), 문교부, 1986년 

 

 

 

서울책보고에 입점한 헌책방 중 오래된 자료들을 다수 보유한 몇몇 서가는 특유의 고풍스러운 빛이 서려 있습니다. 오늘 소개할 헌책을 품은 행운서점 또한 살면서 한 번 볼까 말까 한 1970~80년대 문교부 자료들이 한 칸 가득 꽂혀있어서 눈길을 끄는데요. 그중에서도 서울책보고 개관 때인 2019년부터 지금까지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는 소중한 자료가 있어서 가져와 봤습니다. 바로 문교부에서 만든 ‘한국동식물도감’ 시리즈입니다. 이중에서도 오늘은 ‘식집사 시대’에 어울리는 『한국동식물도감』 제29권 ‘식물편 (화분류)’을 가져와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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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목차만 50페이지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책인데요. 특별히 오늘 가져온 ‘식물편-화분류’는 영어로 ‘POLLENS’라고 적혀 있습니다. ‘화분(花盆)’이 아니고, 생식세포인 ‘화분(花粉)’을 정리한 책인 거죠. ‘화분’은 “종자식물 수술의 꽃밥 안에서 만들어지는 생식세포”로, “암술머리에 붙는 수분 과정을 거쳐 씨앗을 형성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문교부는 식물의 ‘화분’을 충실하게 연구한 이 책을 왜 만들었을까요? 문교부 장관님의 간행사 잠깐 같이 읽어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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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사  


 우리나라의 맑은 하늘, 수려한 산야, 백옥 같은 냇물은 한데 어울려 한 폭의 그림과도 같기 때문에 

옛날부터 삼천리 금수강산(錦繡江山)이라 부르고 있‘읍’니다. 

이 천혜의 아름다운 자연 환경 속에 살고 있는 우리는 

유구한 반만년의 빛나는 역사를 이 땅 위에 이룩해 놓았‘읍’니다.

 이제 우리는 조상이 남긴 훌륭한 문화 유산을 이어받고, 

마음을 합쳐 삼천리 금수강산을 가꾸고 보전하도록 노력하여야겠‘읍’니다.

 문교부에서는 그러한 연차적 사업의 하나로 한국 동식물 도감 제29권 식물편(화분류)을 발간하였‘읍’니다. 

이 도감은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현화식물의 화분과 공중 화분은 물론 

암석, 석탄, 이탄, 퇴적 토양 등에 현화식물이 남긴 화분을 분석함으로써 

화분의 형태, 석유 탐사, 과거의 기후 변동, 농경의 역사, 화분병 등을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하였‘읍’니다.

 아무쪼록 이 도감이 우리나라의 학문과 문화 발전에 조금이라도 

기여를 하고 연구와 실용에 유용하게 활용되기를 바랍니다. 

 끝으로, 이 책을 집필한 장 남기 박사님, 한국 동식물 도감 편찬 심의 위원 여러분, 

그리고 국정 교과서 주식 회사 여러분의 성실한 노고에 사의를 표합니다. 


 

1986년 11월


문교부 장관 손제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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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학문과 문화 발전에 조금이라도 기여하고 연구와 실용에 유용하게 활용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렇게 충실한 도감을 만드셨다니! 이것이야말로 당시 ‘문교부’가 해야 할 일이었나 봅니다. 아, 문교부가 뭐냐고요? 교육·과학에 관한 업무 및 교과용 도서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던 중앙행정기관으로, 지금의 교육부라고 보시면 됩니다. Emotion Ic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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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부에서 이렇게 자세한 자료를 만들었다는 점이 놀랍습니다. 이 자료를 만들기까지 든 수고도 만만치 않더라고요. 이 책을 쓴 저자의 머리말을 살짝 읽어보겠습니다. 

 


머리말


 

우리 나라에서 화분 분석을 위해 처음으로 화분 도감을 출판한 것은 1979년이다. 

공중, 수중, 상양중, 석탄 및 암석 중에서 화분을 분석하려면 

화분의 형태를 우선 분류하여 모식물이 무엇인지 알아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현세의 현화 식물의 화분 형태를 알아야만 한다.

 이에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생물교육과 생리생태학연구실에서는 

현재까지 채집한 819종의 화분과 조직적인 채집과 연구를 위해 꽃피는 계절에, 

꽃피는 방방곡곡을 따라 남한 각지를 돌아다녔다. 

남자고 여자고, 비 오는 날이고 눈 오는 날이고, 낮이고 밤이고 가리지 않고 

새로운 화분의 채취에 온 심혈을 기울였다. 

어느 날인가 진눈깨비를 맞으며 추운 줄도 모르고 마지막까지 정리를 하던 

그 지극한 정성들이 모여 오늘의 이 도감을 볼 수 있게 만들고야 말았다. 

이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연구 예산이라고는 한 푼도 없이 자기 빈 호주머니를 털어가면서 

교통비나 숙식비를 감당해야 했고, 

현미경 사진을 촬영하기 위해 눈을 비비고 잘 생긴 화분을 찾아야만 했다. 

이런 일도 있었다. 

밤늦게까지 화분을 찍고나서 피곤한 몸을 이끌고 잠을 자려 하니 

감은 두 눈에서 화분들의 여러 형태가 보이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면 아마 해야 하겠다는 일념만이 오늘의 결실을 맺게 한 것이라고 믿는다.

 이러한 어려움과 강한 집념이 우리 나라 최초의 원색 화분 도감을 나오게 한 것이라고 자랑하고 싶다. 

더욱 놀란 것은, 우리 생리생태학연구실의 훌륭한 인적 자원에 대한 재평가이다. 

어떠한 어려운 일이라도 마음만 먹으면 꼭 해낼 수 있다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무서운 힘을 발견한 것이다. 

이 힘은 꼭 우리 나라 생물학계의 밝은 횃불이 될 것으로 확신한다.

 그러나 1123종의 식물만을 본 도감은 수록하고 있고 

아직도 북한의 식물을 포함하여 화분의 형태상 누락된 종이 많다. 

앞으로도 지금까지의 경험과 경력을 살려 한국 전체의 화분을 포함하는 

보다 훌륭한 화분 도감을 완성해야 하겠다는 아쉬움이 있다.

 이제 본 한국 화분 도감이 있기 때문에 이것을 기초로 하여 

현세 식물의 화분 형태를 분류할 수 있어 화분과 관련되는 

농학, 약학, 의학, 화분학, 고생태학, 지질학, 고고학, 역사, 지리학 등 

많은 학문 연구가 활발히 진행될 수 있게 되었다는 

긍지에 부족하나마 마음의 위안을 찾고 있다. 

(후략)

 

 

1986년 11월 저자 장남기



아니, 머리말이 이렇게 문학적이고 감동적일 일인가요? 저자와 그 아래 팀의 고생이 눈에 보이는 듯 생생한 묘사입니다. 꽃피는 방방곡곡 돌아다니며 “어느 날인가 진눈깨비를 맞으며 추운 줄도 모르고 마지막까지 정리를 하던 그 지극한 정성들”로, “연구 예산이라고는 한 푼도 없이 자기 빈 호주머니를 털어가면서 교통비나 숙식비를 감당”하기도 하고, “밤늦게까지 화분을 찍고 나서 피곤한 몸을 이끌고 잠을 자려 하니 감은 두 눈에서 화분들의 여러 형태가 보이는” 경지에까지 이르며, 만든 이 책은 정말 고퀄리티입니다. 저자가 확신하신대로, “우리나라 생물학계의 밝은 횃불”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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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책 내용을 한 번 살펴볼까요? 화분을 문>아문>강>목>과>속>으로 분류했고요. 차례만 무려 50페이지에 달합니다. 가령, 은단풍의 분류를 보면,


관속식물문 > 양치식물 아문 > 피자식물 강 > 쌍자엽식물 아강 > 무환자나무 목 > 단풍나무 과 > 단풍나무 속 > 은단풍 


입니다. 내용 한 번 살펴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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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풍나무 과 Aceraceae 단풍나무 속 Acer 은단풍 Acer saccharinum L.

화분의 외형은 장구상이고, AMB는 원형으로서, 구는 가늘고 길며, 공은 일반형이다. 화분의 외벽의 내충은 얇고, 외층은 세립돌기로 된 세망상이다. 화분의 NPC는 345이고, 크기는 17~22 × 26~32 µ이다. 꽃은 황록색이고 4~5월에 핀다. 

채집장소 : 관악산 

_『한국동식물도감』, 607쪽.


은단풍 화분은 이렇게 생겼다고 합니다. 세밀한 묘사가 눈에 띄네요. 정말 화분의 형태가 꿈에 보일 만큼 디테일한 작업이었을 것 같습니다. 그럼 이 화분의 주인공 은단풍 한 번 보고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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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식물의 화분에 대한 자세한 설명과 형태까지 기록한 이 도감. 마이크로 단위의 화분을 하나하나 채집하고 관찰하고 기록하기까지 얼마나 긴 시간이 걸렸을까요? 거기에 더해 ‘한국 식물 명명자’에 대한 일목요연한 정리와 한국명 색인까지 꼼꼼하게 정리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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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가래

가는개발나물

가는금불초

가는기린초

가는쑥부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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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리갓 

개구릿대

개기장

개꽃

개나리


 

 

우리 곁의 식물들은 이토록 다채로운 이름을 가지고 존재하고 있었네요. 이름 하나하나 불러보며 우리 삼천리 금수강산을 수놓고 있는 식물들을 기억하고 싶게 만드는 아름다운 도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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