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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LIFE

[SIDE B] 책 읽지 않는 시대, 책으로 말을 건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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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문학 서점에서 책을 사는 사람들

 

차경희 

고요서사 대표

 

 

 

반으로 접힌 흰 종이에는 시집 제목이 가득했다. 열다섯 권의 제목이 볼펜으로 적혀 있었다. 어린 시절 깍두기공책에 쓰던 글씨처럼 반듯하고 네모진 큰 글씨로 힘주어 적힌 시집 제목들은 한 중년 남성이 내게 건넨 주문 목록이다. 약 3, 4년 전부터 이따금 서점에 들르는 이분은 시집만 사는 독자다. 한동안은 외국 시집에 관심을 두기도 해서 신간 시집들을 서점의 추천으로 구매하기도 했고 신춘문예 당선시집은 거의 매년 챙겨 읽는 듯했다. 어쩌면 시를 쓰고자 하거나 이미 쓰고 있는 분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책에 관한 정보나 감상을 주고받는 것 외에 다른 대화는 해본 적 없다. 어쩌면 그저 시를 읽는 일이 즐거운 경우일 수도 있다.

 

이 손님은 원하는 시집들을 한꺼번에 주문한 뒤 서점에 책이 도착했다는 문자를 받으면 찾아가기를 몇 년째 반복하고 있다. 주로 광화문의 대형서점을 이용하지만 불현듯 고요서사가 생각나면 들른다고 했다. 「오래 속삭여도 좋을 이야기」,「중얼거리는 천사들」,「용서를 배울 만한 시간」등 4월에 마주한 제목들은 왠지 더 각별하게 읽혔다. 이분이 건넨 긴 시집 목록을 보며 나는 이번 봄의 기운이 움트는 것을 느끼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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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는 초로의 여성이 이 작은 서점의 서가를 오랜 시간 샅샅이 둘러보았다. 고심을 거듭하며 고른 책들을 카운터로 갖고 온 이 손님은 서울에서 먼 지역에서 왔다고 했다. 자신은 인터넷 서점을 전혀 이용하지 않고 여러 동네 서점을 돌아보며 책을 사곤 하는데, 내가 참여하는 문학 팟캐스트 '요즘 소설 이야기'를 챙겨 듣다가 서점에 오게 됐다고 했다. 생각보다 서점이 작지만 책이 알차서 좋다고 말하며 미소를 보이고 떠나셨다.


해방촌에 살다 이사를 가게 되어 이제는 얼굴을 본 지 오래인 한 손님도 생각난다. 젊은 물리학자인데, 한 달에 한 번 자정까지 영업을 했던 ‘해방촌 심야 책방’을 이어가던 몇 년 전 이곳에 처음 왔었다. 이후 이따금 들러 주로 소설이나 문예지를 구입해 갔다. 힉스 입자 연구자이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데, 학부생 제자들이 고전 문학을 전혀 읽지 않았다는 사실에 놀랐다며 카프카의 소설을 학생들 선물용으로 여러 권 주문해 구입한 적이 있다. 자신의 연구 분야에도 열정적이었지만 문학을 탐독하는 그 마음 또한 열렬했다. 


소설이나 시 관련 행사를 진행할 때마다 얼굴을 자주 비치는 분들 중 국어교사가 몇 분 있다. 아마도 교사들은 교과 과정에만 집중하고 교과서 밖 작품들에는 관심이 전혀 없을 거라는 나의 편견은 이분들 덕분에 몇 년에 걸쳐 깨지고 또 깨졌다. 문학을 사랑하며 읽고 좋은 작품을 발견하면 주변 사람들과 공유하는 것은 물론이고, 동시대의 작품들을 수업 과정에도 적용하여 학생들에게도 읽히려고 노력하는 모습에 진심으로 존경심이 들곤 한다. 

 

요즘은 철학자 들뢰즈의 인터뷰를 매개로 하는 온라인 워크숍을 진행하고 있다. 독립출판 제작자이자 손님으로 서점에 종종 오던 분과 함께 기획하고 운영하는 워크숍이다. 철학 전공자로 학업을 마친 뒤 예술 분야 비평을 쓰면서 작은 출판사를 운영하는 분이 모임장이다. 새로운 형식과 방식의 출판 작업에 관심이 큰 분이기도 하다. 이 워크숍에는 정말 다양한 직군과 연령대의 사람들이 참여한다. 당직 근무 중 틈틈이 자신만의 철학적 사유를 메모하고 사람들과 공유하는 직장인, 영화를 전공하며 철학과 소설에도 관심이 지대한 스무 살 대학생 등 이 워크숍을 통해 기존에 만나보지 못했던 새로운 독자군을 기쁘게 발견하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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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서사라는 문학 서점을 운영한 지 5년 6개월. 주요 방문객은 20, 30대이고 여성이 70퍼센트, 남성이 30퍼센트쯤 된다. 작가이거나 작가를 희망하는 사람, 출판계 혹은 창작 관련 일을 하는 사람들이 방문객의 대부분을 차지할 것이다. 하지만 내 예상을 벗어난 독자들을 이곳에서 만나는 순간들이 있다. 앞서 말한 손님들이 그런 독자들이다. 이분들을 마주할 때마다 마음이 겸허해진다. 이 겸허한 마음은 전염병 시대에도 서점 문을 열고 닫게 해주는 동력이 된다.

 

과연 책으로 말을 거는 사람은 누구인가?


책을 읽는 사람들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말을 참 오래도 들어왔다. 사실이다. 통계상의 독자는 절망적으로 줄어들고 있고 책은 점점 낡은 존재로 취급받는다. 책을 내고 싶은 사람들이 책을 사고 출판계 종사자들이 가장 주요한 독자의 위치를 차지하는 시장구조가 점점 굳어지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일 수 있다.


서점을 두고 ‘책으로 사람과 사람을 잇는’ 공간이라고 말하는 경우를 많이 봤다. 사람들이 책을 읽지 않는 시대에도 끈질기게 ‘책으로 말을 거는 사람’을 서점 운영자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서점을 찾아 서가를 탐색하고 자신이 원하는 책을 발견해내며, 서점에서 만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독자들이 진정으로 ‘책으로 말을 거는 사람’ 아닐까. 독자들을 마주하며 ‘사람(독자)으로 책과 책을 잇는’ 공간, 책을 오롯하게 존중하는 사람들이 모여 좋은 책을 품고 나누는 공간이 이 시대에 필요한 서점의 모습이라고 끈질기게 고집해본다. 사랑방이나 문화 공간이라 불리는 것은 그다음 일이다. 


계속해서 좋은 책 가까이에 있으려고 노력하는, 여전히 존재하는 많은 독자들에게 고요서사는 아직 충분히 가닿지 못했다. 다양한 독자를 더 많이 발견하고 발굴해내는 것. 이것이 서점의 첫 번째 소임임을 열독자인 손님들이 늘 깨우쳐준다.

차경희
해방촌 문학 서점 '고요서사' 대표

2015년 10월부터 서점을 운영하고 있다. 서점을 열기 전에는 출판편집자로 일했고 어쩌다 보니 계속해서 책과 연결된 여러 가지 일들을 하고 있다. 책을 다양한 방식으로 접하고 그 경험을 나눌 수 있는 방법들에 대해 고민하며 새로운 형식의 낭독회, 북토크, 책 모임을 서점 내외부에서 기획•운영한다. 주제와 공간에 따른 도서 큐레이션을 수행하기도 하며, 한국외국어대학교 내 서점인 문화상점 '이문이공칠'의 도서 큐레이션을 맡고 있다.문예지의 문학 작품을 소개하는 팟캐스트 <요즘 소설 이야기>를 진행하고 있고, KBS1라디오 <정용실의 뉴스브런치>에서 격주로 신간을 소개한다. 문예지 (에픽)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하는 등 책/문학과 관련한 다양한 콘텐츠 생산에도 참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