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

BOOK&LIFE

[SIDE A] 그날 나는 정말 바다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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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나는 정말 바다로 갔다

몰래 두고 힘들 때마다 꺼내 읽는 시

 

 

오은

시인

 



너무 좋아서 몰래 읽는 시들이 있다. 한때는 나만 알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있다. 많은 이들에게 읽힐수록 언어의 밀도가 낮아진다고 생각했으니까. 나만 알고 있다가 중요한 순간에 깜짝 놀래 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누군가와 어떤 대상을 함께 좋아하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 몰랐던 시절 얘기다.


주변에 시 쓰는 사람이 많고 나 역시 그 일을 꽤 오랫동안 해왔지만, 여전히 나는 읽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들이는 사람이다. 이미 메모장은 시집을 읽다가 마음에 든 구절들로 한가득하다. 그것들을 힘들 때마다 꺼내 읽는다. 은은한 향이 나는 사탕 같기도 하고 오래 달리기 후에 마시는 청량음료 같기도 하다. 같은 시라도 읽을 때의 상태에 따라 다른 맛이 느껴지는 게 신기하다.


사실, 어떤 시를 나만 알고 싶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너무 좋은 것은 어떻게든 빛을 발하니까, 그 빛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이들이 다름 아닌 독자니까. 그때부터 시를 나만의 방식으로 읽고 기억하겠다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좋은 시는 읽는 이에게 다가가 각자의 방식으로 스며드니까, 개인의 기억과 조응하며 양감을 얻고 단어와 단어, 그리고 문장과 문장의 마찰에 의해 고유한 질감을 얻으니까.


오늘은 진은영의 〈멜랑콜리아〉(《우리는 매일매일》, 문학과지성사, 2008)를 다시 읽었다. 3연 11행으로 구성된 짧은 시인데, 단숨에 읽히기도 하고 아주 천천히 읽히기도 한다. 주로 힘들 때 이 시를 찾아 읽게 된다. 이해받지 못했거나 이해받고 싶지 않을 때 나는 답이 분명한 세계에서 잠시 등 돌린 채 있곤 한다. 옳고 그름과 맞고 틀림이 가득한 세계에서는 주목받지 못하는 장면을 적극적으로 응시하고 싶다. 그리고 그런 장면들은 으레 문학 작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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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매일매일》, 진은영, 문학과지성사, 표지 사진 출처 : 문학과지성사 홈페이지(클릭 후 이동)

  

‘멜랑콜리아(melancholia)’는 우울증을 뜻하지만, 이 시는 어쩌면 그것을 알아주는 시처럼 느껴진다. 위로해주는 시가 아니라 알아주는 시. 괜찮을 거라고 속단하거나 힘내라고 격려하는 대신, 아무리 가까이 지낸다 해도, 제아무리 뜨겁게 사랑한다 해도 사람이 사람을 이해하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때에 따라서 이는 가벼운 슬픔으로 다가오기도 하고 평생을 떠안고 살아가야 하는 질병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 시의 첫 연은 이렇게 시작한다.


그는 나를 달콤하게 그려놓았다

뜨거운 아스팔트에 떨어진 아이스크림

나는 녹기 시작하지만 아직

누구의 부드러운 혀끝에도 닿지 못했다


 

그는 나를 그려놓았고 나는 아스팔트 위에 아이스크림으로 떨어져 녹기 시작한다. 나는 달콤한 존재지만 뜨거운 아스팔트 위에서 나의 매력은 아무 소용이 없다. 나는 “누구의 부드러운 혀끝에도 닿지 못”한 채 완전히 녹아버릴 것이다. 이처럼 열렬히 사랑했지만, 사랑하는 방식이 상대를 뒷걸음질하게 만드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온도 차는 개성이 드러날 여지를 없애버린다. 그리하여 달콤함과 뜨거움은 예상치 않은 곳에서 만나 한 존재가 다른 한 존재를 휘발시키고야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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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달콤한 존재지만 뜨거운 아스팔트 위에서 나의 매력은 아무 소용이 없다. 

 


<멜랑콜리아>의 마지막 연은 다음과 같다.


그는 정말로 낙관주의자다

내가 바다로 갔다고 믿는다

 


떠난 뒤에야 발견되는 것들이 있다. 내가 그 사람을 정말 사랑했구나 하는 사실부터 우리가 실은 하나도 맞는 것이 없었다는 사실까지, 하나같이 뼈아프다. 우리는 서로를 이해한다고 믿었지만 실은 사랑을 앞세워 저돌적으로 오해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사랑이 끝난 뒤, 비관주의자는 으레 자기 탓을 하며 다시는 사랑을 할 수 없을 것이라 자책한다. 낙관주의자는 떠난 상대가 제 갈 길을 찾아 무사히 목적지에 당도했을 거라 믿는다. 그리고 바다에 가면 재회할 수 있을 거라는 헛된 희망에 부풀기도 한다. 이 시는 이렇게 나를 또 한 번 우울에서 꺼내 명랑 쪽으로 돌려 앉힌다.

 

 


《우리는 매일매일》에는 이런 시들이 참 많다. 과자가 잔뜩 든 종합 선물 세트를 받았을 때의 기분이다. 무엇이 들었을까 궁금해하며 눈을 똥그랗게 뜨는 마음, 포장을 뜯고 다채로운 과자의 물결에 함지박만 하게 입을 벌리는 마음, 아는 과자를 발견한 뒤 안도하고 모르는 과자를 살피며 두근거리는 마음, 봉투를 뜯고 나서 안에 담긴 내용물이 풍기는 냄새를 힘껏 들이마시는 마음, 시집에는 이런 마음들이 차곡차곡 담겨 있다.


그날 나는 정말 바다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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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은

시인

 

이따금 쓰지만, 항상 쓴다고 생각합니다. 

항상 살지만, 이따금 살아 있다고 느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