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듀나
1990년대 초, 하이텔 과학소설 동호회에 짧은 단편들을 올리면서 경력을 시작했다.
단독 작품집인 『나비전쟁』, 『면세구역』, 『태평양 횡단 특급』을 발표하면서 지금까지 살아남았다.
SF 작가로서 통신망 시절 아마추어리즘과 지금의 장르 작가들 사이의 교량 역할을 했다는 것에 의미가 있다.
SF 작업과는 별도로 영화 칼럼을 쓰고 있고 이쪽 관련 책을 여러 권 냈다.
1) 올랜도| 버지니아 울프
어렸을 때 내가 가장 미친 것처럼 웃어대며 보았던 책 중 하나다. 이에 비교될 만한 건 오스카 와일드의 『캔터빌의 유령』 정도밖에 없는 거 같다. 이 책을 다시 읽으면서 그때처럼 웃는 건 불가능하지만, 울프의 사생활과 실제 역사를 판타지화 하는 그 능청스러움에는 아직도 혀가 돌아간다. 울프가 그렇게 웃기는 작가라는 걸 당시엔 감히 상상도 하지 못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2) 어둠의 왼손| 어슐러 K. 르 귄
내가 이 업종의 일을 할 수 있게 동력을 제공해 준 책이다. 내가 즐겁게 읽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느꼈던 영어권 황금시대 SF의 세계 말고도 또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고 할까. 세월이 흐르면서 이 책의 세계관 구축 방식을 조금씩 비판적으로 보게 되었는데, 그 과정 역시 내 세계를 넓히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 끊임없는 대화가 가능한 책이다.
3) 거장과 마르가리타 | 미하일 불가코프
소비에트 러시아 시절을 다룬 가장 환상적이고 화려한 책이다. 어처구니없이 비현실적이지만 그만큼이나 작가가 살아왔던 소련 시절의 현실을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는데, 솔직히 읽다 보면 그 둘의 경계가 어디에 있는지 확신하기가 어렵다. 불가코프의 내면 안에서는 그게 그렇게까지 중요한 무언가는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4) 베스트 오브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 |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
작가는 오직 자기가 쓸 수 있는 것만 쓰는 사람이고 그게 꼭 추구의 방향과 일치하지는 않는다. SF의 작가인 내 추구의 방향엔 늘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가 있었다. 「체체파리의 비법」 같은 단편을 굳이 쓰고 싶지는 않지만 (처음 읽었을 때의 얼얼함이 아직 근육 어딘가에 남아 있다.) 『접속된 소녀』와 같은 작품을 꾸준히 계속 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5) 1999년생 | 신일숙
내 세대의 많은 SF 작가들에게 한국어로 SF를 쓰는 작업의 견본을 제시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순정 만화 작가들이었다. 나는 특히 『1999년생』으로부터 많은 걸 배웠다. 아직도 SF 액션을 쓸 때 이 만화로 돌아간다. 여기에 대해 끊임없이 떠들어 댄 결과 나는 이 만화책의 속편 『2023년생』을 쓸 기회를 얻었다. 보라. 자기 영업이 이렇게 중요하다.
6) 우주복 있음, 출장 가능 | 로버트 A. 하인라인
나는 이 책을 유치원 시절 잡지에 연재되었던 한국판 번안물로 처음 접했다. 그러니까 내가 처음 읽은 SF 장편이다. 당시 내가 읽었던 엄청 재미있었던 이야기가 하인라인의 청소년 고전이라는 걸 1990년대에 들어서야 알았다. 어쩔 수 없는 미국 50년대 남자 청소년 대상의 우주 모험담인데, 그래도 한 번은 이 시기를 통과해야 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