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Vol. 08

BOOK&LIFE

[SIDE A] 아트북에 대한 단상들

lbpodcasts.jpg

▶ Libby Barrett의 아티스트북, 출처 : Libby Barrett 웹사이트(클릭 후 이동)

 

아트북에 대한 단상들

 

임경용

더 북 소사이어티 / 미디어버스 대표

 

 

 

아트북에 대해 이야기를 하기는 쉽지 않다. 다양한 장소와 세대를 통해 만들어졌기 때문에 설명해야 하는 대상의 범위가 넓기도 하지만 각자 고유한 특징을 가지고 있는 아트북을 보편적 언어로 설명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간단하게 정의를 내리자면 아트북은 예술에 대한 책을 지칭한다. 예술 장르로 구분을 하자면 책을 열심히 많이 만드는 미술 작가들의 책이 대표적일 것이고, 문학이나 사진, 건축, 디자인, 영화, 음악부터 패션이나 심지어 공학 관련 책 중에도 아트북이라고 부를만한 책들이 출간되고 있다. 우리가 서점의 예술 섹션에서 발견할 수 있는 아트북은 대체로 처음부터 끝까지 어떠한 주제를 이미지와 텍스트로 설명하는 책들이다. 여기에는 특별히 어려울 것은 없다. 반 고흐나 렘브란트 같은 화가에 대한 책도 아트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고, 한국 현대미술에 대한 두꺼운 텍스트 북도 넓은 의미에서는 아트북이라고 부른다.

 

문제가 복잡해지는 것은 예술에 대한책이 아니라 책 자체가 작품이 되는 책도 아트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서 시작한다. 이러한 책을 보통 아티스트 북이라고 하는데 20세기 초반 초현실주의자나 미래주의자, 러시아 구성주의 작가들과 이후 솔 루윗, 로버트 모리스, 로렌스 바이너, 칼 앙드레 같은 개념미술 작가들과 플럭서스 작가 등이 만든 잡지와 책을 서구 미술사에서는 흔히 아티스트 북으로 규정한다. 1980년대 설립된 뉴욕의 프린티드 매터 같은 서점이 이러한 책에 미술사적으로 의미를 부여하고 뉴욕현대미술관에 아티스트 북 컬렉션이 소장되면서 아티스트 북이 제도적으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티스트 북은 엄밀한 의미에서 읽기 위해 만든 책은 아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책을 읽는 이유가 지식이나 정보를 얻기 위함이지만 이런 책의 상당수는 특정한 작품이나 작가에 대한 정보나 지식을 전달하지는 않는다. 아티스트 북은 대신 그 자체가 시작이고 끝인 자율적인 형식의 책이다.

 


cri_000000266060.jpg

▶ <제록스 북>,  출처 (클릭 후 이동)

 

가장 대표적인 아티스트 북 가운데 하나인 <제록스 북>은 책을 통해 전시를 구현하고자 했던 세스 지겔라우브가 1968년에 만든 책이다. 그는 당시에 새롭게 등장한 제록스 복사기를 가지고 책을 만들고자 했고 친구들의 작품을 모아 제록스로 복사를 해서 그걸 책처럼 묶어냈다. 실제 제작에 있어서는 복사비가 너무 비싸 옵셋 인쇄로 대체되기는 했지만 이러한 움직임에는 특유의 경쾌함이 있다. 세스 지겔라우브는 <제록스 북>을 기획한 동기에 대해 책을 통해 작품을 감상하는 다른 방식을 보여주기 위해서라고 이야기한 바 있다. 전시장에서 작품을 보는 것과 책을 통해 작품을 보는 것은 분명히 다르다. 그렇다면 왜 작가들은 책을 자신의 작품을 보여주거나 큐레토리얼적 실천을 위한 무대로 활용하는 것일까? 여기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명이 가능하다. 그리고 그러한 배경을 이해하는 것은 지금 아트북이나 아티스트 북의 경향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최소한의 출입문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들이 책을 만드는 첫 번째 이유는 (너무나 당연하게도) 책이 가진 장점 때문이다. 책은 상대적으로 제작비가 저렴하고 자신이 원하는 수량만큼 제작과 유통을 할 수 있으며 이동이 용이하면서 자신의 의도를 실현할 수 있는 다양한 장치를 가지고 있는 강력한 매체이다. 예를 들어 책을 구성하는 페이지는 텍스트나 이미지를 자신이 원하는 만큼 배치해서 이야기나 개념을 전달할 수 있다. 종이로 이뤄진 페이지는 전자 장치와 다르게 충전이 필요 없(약간의 빛이 필요하긴 하지만) 언제 어디서나 꺼내서 읽을 수 있다. 또한 책은 인간이 태어나면서 거의 가장 처음 접하는 매체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책에 익숙하다. 복잡한 설명서 없이 누구나 직관적으로 책을 들고 펼쳐 읽을 수 있다. 심지어 자신이 글씨를 읽을 수 없다고 해도 자신만의 방법으로 책을 이해할 수 있다. 책이 가진 고유의 촉감은 내용적인 부분이 아니라 공감각적으로 책을 이해할 수 있는 통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술가들은 책이 가진 이러한 무한한 가능성을 놀이터 삼아 다양한 종류의 아트북을 제작했다.

 

 

 

울리포의 일원으로 프랑스 출신의 소설가이자 시인인 레몽 크노는 <백조 편의 시(cent mille milliards de poèmes)>라는 책을 1961년에 발표한다. 14행으로 이뤄진 시를 쓰고 각 행마다 10가지 다른 버전을 가진 책을 만든 것인데 독자들은 이러한 행을 다양한 방식으로 조합할 수 있기 때문에 수학적으로 이 책은 백조 편에 달하는 시를 가지게 되었다. 물론 이 책을 시집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이 가진 가능성을 극단으로 밀고 간 아티스트 북처럼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레몽 크노는 책이 가진 가능성을 경유해 우리가 읽는다는 것의 본질적인 부분에 대해 한번 생각해볼 것을 제안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이 책이 보여줄 수 있는 백조 편의 시를 모두 읽은 이는 없을 것이다. 수학자의 말을 따르자면 이 시를 다 읽는데 (한 편을 읽는1분으로 잡는다고 해도) 모두 2백만 년이 소요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을 온전히 읽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SDC16838.JPG

▶ <백조 편의 시(cent mille milliards de poèmes)>,  출처 (클릭 후 이동)


책이 가진 제도적인 속성도 작가들에게는 책을 만들기 위한 좋은 통로가 된다. 책은 기본적으로 정보와 지식을 보존하고 전달하기 위해 만들어진 매체이고 인류는 자신들이 취득한 지식과 경험을 책 안에 넣어 후손에게 전달하고자 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책을 효율적으로 보존하기 위한 강력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했다. 도서관이나 아카이브, 그리고 책을 분류하는 복잡한 분류법까지. 책이 가진 제도적인 속성은 인터넷 시대에 더욱 강력해지는 것처럼 보인다. 수많은 정보가 위계 없이 수평적으로 돌아다니는 인터넷 공간과, 상대적으로 정보에 접근하기 위해서 더 많은 절차와 제약이 따르는 책 공간을 비교하자면 책은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해야지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책을 관리하고 보존하는 움직임은 책에 있어 필수적이지만 동시에 이것은 책에 필요 이상의 형식적인 어려움을 부과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예술가들은 책의 제도적인 제약을 활용하면서 작업을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작가인 Sasa[44]와 디자이너 슬기와 민은 2007년부터 매년 애뉴얼 리포트를 만들어오고 있다. 애뉴얼 리포트는 모두가 알다시피 기업이나 관공서가 매년 자신의 성과를 기록하기 위해 형식적으로 만드는 보고서이다. 그렇기 때문에 애뉴얼 리포트 자체가 유통되거나 형식적으로 실험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하지만 Sasa[44]와 슬기와 민은 애뉴얼 리포트가 가진 형식을 활용해 일종의 아티스트 북을 만들고 있는데 대략 이런 식이다. Sasa[44]는 매년 자장면 소비량이나 교보문고에서 구입한 책의 숫자, 자신의 작업실을 방문한 사람들의 숫자, 설렁탕 소비량, 휴대 전화 통화량 등 8가지 지표를 기록하고 그것을 수합해 그다음 해에 다양한 방식으로 애뉴얼 리포트를 발행한다. (형식적인 고민은 아마도 디자이너인 슬기와 민의 몫일 것 같다) 어느 해는 영수증 같은 것을 잔뜩 모은 두터운 책으로 나오기도 하고 포스터 한 장으로 구성되기도 한다. 물론 다른 아티스트 북처럼 여기에 있는 수치나 통계도 읽어야 할 대상은 아니다. 어느 누구도 Sasa[44]가 작년에 자장면을 몇 그릇 먹었는지, 교보문고에서 책을 몇 권이나 샀는지 관심 없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대신 여기에는 책의 기록이나 보존 능력, 그리고 애뉴얼 리포트의 관료주의에 대한 비평적 태도가 있다. 좀 더 흥미로운 것은 Sasa[44]라는 작가와 슬기와 민 사이의 협업의 방식이다.

 


Sasa_Annual_Report_2007-1 (1).jpg

▶ 출처: 스펙터 프레스 웹사이트 (클릭 후 이동)

 


20211029_185621.jpg

▶2019년 싱가포르 아트북 페어, 사진 출처 : 임경용

 

협업은 책을 기획하고 제작하고 유통하는 데 있어서 필수적인 부분이다. 어느 누구도 책을 혼자 만들고 판매하지는 않는다. 내가 디자이너라면 책을 만들기 위해 누군가(대부분 저자나 편집자일 텐)에게 자료를 요청해야 할 것이다. 편집자라고 한다면 책을 인쇄하고 제본하고 판매해주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필요하다. 이것은 자연스럽게 책의 공동체적 속성과 연결된다. 아트북, 아티스트 북의 역사에 있어서도 이러한 협업은 필수적일 뿐만 아니라 아주 자연스러운 풍경이 되었다.

 

이제 우리에게도 아트북 페어는 그렇게 낯설지 않다. 책의 생산자와 소비자가 모여 책에 관해 이야기하고 교류하는 북페어는 꽤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지만, 근대적 의미의 아트북 페어는 아마 뉴욕의 프린티드 매터가 2005년 뉴욕현대미술관 분관인 PS1에서 시작한 뉴욕 아트북 페어일 것이다. 뉴욕 아트북 페어는 당시 유행하기 시작한 소규모 출판, 독립출판을 중심으로 아트북을 정의하고 전 세계 여러 지역에서 이러한 책을 생산하는 출판사를 섭외했다. 이후 로스앤젤레스와 베를린, 파리, 브뤼셀, 마드리드 등 유럽을 중심으로 아트북 페어가 활성화되기 시작해, 2021년 현재 도쿄나 서울, 홍콩, 싱가포르, 상하이, 베이징, 방콕, 쿠알라룸푸르 등 아시아 주요 도시까지 자신이 만든 책을 판매하고 구입하고자 하는 사람들로 북적이는 행사를 가지게 되었다. 동시에 아트북 페어는 책을 사고파는 역할 이외에 책에 관한 생각을교류하는 사교의 장이자 교육의 장이 되고 있다. 그 결과 더 많은 사람이 아트북을 만들고 그것을 유통하기 시작하고 있다.

 

 

 

1920년대 초현실주의를 이끌었던 앙드레 브레통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람들은 동료를 찾기 위해 책을 만든다.” 브레통은 새로운 예술을 하고자 했고 그 시작은 자신과 생각이 비슷한 동료를 만나는 것이다. 책을 만드는 과정은 지난하고 많은 논쟁과 토론을 요구하기 때문에 출판을 하는 것은 동료를 찾고 만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 가운데 하나가 된다. 사실 예술 역시 마찬가지 아닐까? 과거에는 혼자 치열하게 고민하는 작가의 모습이 일반적이었다면 지금 작가들은 우리 사회의 여러 영역을 넘나들면서 많은 사람을 만나고 고민한다. 그렇기 때문에 어쩌면 브레통의 말에 모든 비밀이 숨어 있을지도 모르겠다. 여전히 사람들은 동료를 찾기 위해 책을 만든다. 그리고 그렇게 책을 만드는 과정은 물리적으로 책을 출판하는 것뿐만 아니라 일종의 예술적 실천으로 작가의 활동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 된다. 

 

 

 


654654.jpg

 

임경용

더 북 소사이어티/미디어버스  대표

 

2007년부터 서울 종로구 통의동에서 책을 기획하고 편집하고 판매하는 일을 하고 있다

예술과 관련된 책을 주로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