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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 07

BOOK&LIFE

[SIDE B] 사라져 가는 것, 굳이 나쁜 것만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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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출처 : 위키백과(클릭 후 이동))

 

사라져 가는 것, 굳이 나쁜 것만은 아니다. 

 

수잔 샤키야

방송인, 번역가

 

 

 

 

우산 없이 자연스럽게 기분 좋게

비 맞고 다녔던 그 시절 

그리고 사람들이 

최대한 비를 피하고 있는 

현재 시대의 모습 

마음은 조금 이상하지만 

시간 그리고 그 시간 속의 변화가 일으킨 

환경이라 생각한다.

갑갑한 이 상황을 바꾸긴 힘들지만 

내일은 또 어떨까 하는 조바심에 숨 막힌 마음을

안심시킨다.

오늘의 촉촉이 내리는 가을비를 즐기면서 

내일의 상쾌한 공기와 맑은 하늘을 기대한다.

 

 

 

Emotion Icon 짙은(Zitten) - 사라져 가는 것들

 

 

가수 짙은(Zitten)의 노래 〈사라져 가는 것들〉을 듣다가 문득 옛 추억에 잠겨 시 한 편을 썼다. 어릴 적 네팔에서는 갑자기 비가 내릴 때가 많았다, 정신없이 내리던 비를 피하지 않고 신나게 맞으며 다녔던 기억들이 떠오른다. 이제 그 추억 속 모습들은 노래 가사처럼 되었다. 한때 우리가 좋아했던 것들, 즐겼던 것들이 흩어져가는 우주의 저 먼지들처럼 다시 만날 수 없게 되었다. 추억 속 모습들이 사라져간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사라져간다.


2년 전 내 인생의 가장 친한 친구이기도 했던 나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소식이 믿기지 않고 비통했다. 아버지와 같이 앉아 술 한잔하면서 한국에서 내가 경험했던 어려움 그리고 성취한 것들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하지만 시간은 그런 내 소원을 허락하지 않았다. 친구처럼 가까웠던 아버지는 고집이 센 편이었지만 항상 나의 편을 들어주셨다. 학창시절 어느 시험 기간이었다. 복잡한 버스 타지 말고 편안한 택시 타고 시험 보고 오라고 일을 나가시기 전에 책상에 차비를 올려놓고 가셨다. 내가 말을 안 해도 내 마음속을 알고 있던 아버지가 무척 그립다. 박완서 작가님의 《사라져가는 것에 대한 애수》라는 책에서 할머니는 수많은 발자국 소리들 속에서 영락없이 또마의 발자국 소리를 가려낼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발자국 소리를 어떻게 가려낼 수 있냐는 질문에 할머니는 이렇게 답을 하셨다, “그건 말야, 나리 나리 개나리의 곡조와 뻐꾹 뻐꾹 뻐꾹새 노래의 곡조가 다르듯이, 이 세상의 수많은 노래의 곡조가 다 다르듯이, 사람의 발자국 소리에도 저마다의 곡조가 있단다. 할머니는 우리 또마의 발자국 소리의 곡조를 알고 있고 그걸 제일 사랑한단다.”(《사라져가는 것에 대한 애수》중에서, 박완서, 문학동네) 박완서 작가님의 할머니처럼 우리 아버지도 내 마음의 곡조를 아셨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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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지 출처 : 문학동네 홈페이지(클릭 후 이동

 


책 읽는 모습들이 사라져간다.


한국에 와서 여러 곳을 다녔는데 그중 춘천은 나의 고향인 카트만두와 비슷하다. 산들로 둘러싸여 있고 호수들도 많다. 춘천 실레마을 문학촌에 있는 〈책과 인쇄박물관〉에 방문했을 때 활판 인쇄로 태어난 소설가 김유정의 책들을 보게 되었다. 활판으로 인쇄된 책들을 보니 마치 글들이 느껴지는 것 같았고 책 읽는 맛부터 매우 다를 것 같았다. 춘천에 있는 박물관에서 네팔 우리 동네에 있던 작업실이 떠올랐다. 오래된 활자 인쇄판을 사용해서 책을 찍어내던 작업실이었다. 네팔에서는 책이 많지 않아 책을 구하기가 꽤 어려웠는데 그 작업실에 가면 아직 완성이 안 된 책들을 볼 수 있었다. 활판 인쇄 잉크에서는 쿰쿰한 냄새가 났다. 하지만 지금은 그 냄새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 냄새를 기억할 수 있는 주변 사람들도 이제는 많지 않을 것 같다. 잉크 냄새도 나고 무게도 무거웠지만, 그 책에서 피어오르는 종이 냄새는 읽는 사람들의 마음을 푸근하게 해줬다. 실핏줄처럼 번진 잉크가 만든 올록볼록한 활자가 주던 자극은 지금도 만져질 듯이 생생하다. 너무 매끈하고 세련된 요즘의 디지털 인쇄 글자에서 느낄 수 없는 아련한 느낌도 있다. 2010년 한국에 처음 왔을 때는 사람들이 지하철에서 책을 읽고 있는 모습도 흔히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요즘은 이 모습을 찾기가 어렵다. 모두 스마트폰을 보고 있다. 오래된 잉크의 냄새가 잊혀가는 것처럼 책을 읽는 사람들의 모습이 오래된 그림처럼 잊혀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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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인쇄 박물관(사진출처 :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웹사이트(클릭 후 이동))

 

 

차별의 시선이 사라져간다.


코로나19의 확산을 방지하고 앞으로 또 발현될지 모를 또 다른 유행병을 통제하는 적절한 방법의 하나는 마스크를 착용하는 것이다. 나와 너 그리고 우리 모두를 위해 마스크를 잘 써야 한다. 그런데 나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마스크도 쓰고 있다고 생각한다. 바로 무지, 증오, 차별, 위선의 마스크이다. 이런 가면 같은 마스크를 벗을 때야말로 보이는 마스크, 보이지 않는 마스크를 모두 안 쓰고 살 수 있는 평화로운 미래가 올 것으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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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득이》, 김려령, 창비 / 거북서점(1,000원)

 

네팔은 개발도상국이다. 행복지수는 높지만, 경제적으로는 아직 가난한 나라이다. 네팔에서 한국으로 일하러 오는 네팔 사람들의 숫자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네팔뿐만이 아니라 동남아시아 여러 국가에서도 많은 근로자가 한국으로 일하러 오고 있다. 한국인들은 정이 많다. 그래서인지 한국인들은 외국인들에게 매우 잘해준다. 그런데 2010년에 한국에 처음 왔을 때는 백인들에게 조금은 더 잘 대하는 한국인들의 모습을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에는 여러 문화권에서 온 사람들에게 모두 비슷하게 대하는 것 같다. 아니 조금 더 확실하게 말하면 이제는 외국인이라고 다르게 대하지 않는다는 말이 맞을 것 같다. 한국 사회는 급속도로 국제화됐다. 김려령 작가님의 소설 《완득이》를 읽으며 높아진 다문화에 대한 인식을 느꼈다. 완득이가 수업 시간에 그림을 보다가 ‘저 아줌마들 자기들 나라에서는 다 배울 만큼 배운 사람들입니다’라고 하는 말이 인상적이었다. 요즘 사회는 말 그대로 ‘다문화’다. 차이를 인정하고 차별 없는 사회를 만들려는 한국인들의 노력이 계속된다.

 

빠르고 효율적인 것만 추구하는 세상에서 사람들은 느리고 거칠지만 더욱 따뜻하고 인간적인 감정과 애정이 담긴 아날로그 analog의 향기를 그리워한다. 급변하는 시대에서 나 혼자 뒤처지는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일상이 된 지 오래다. 추억 속 모습들이 사라져 간다. 사랑하는 사람들, 책 읽는 모습이 사라져 간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사라져 간다고 불안해만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차별이 사라지고 우리가 무지로 쓰던 혐오와 증오의 마스크도 사라지고 있다. 사라져 가는 것 자체가 무조건 나쁜 것만은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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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잔 샤키야 

SHAKYA SUJAN RATNA

방송인, 번역가, 통역사


jtbc <비정상회담>의 네팔 대표. 

약 11년간의 한국 생활을 바탕으로 방송, 강연, 홍보대사 등 다양한 영역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며

한국과 네팔 간 문화 교류에 힘을 쓰고 있다. 

 jtbc<비정상회담>,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MBC<어서와 한국은 처음이지>, <대한외국인>,

KBS<이웃집 찰스> 등 다수의 방송에 출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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