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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 01

COMMUNITY

[시민의 시간] 시민 사연 <나에게 헌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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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 사연 

바랜 헌책이 그 빛을 찾을 때

이즈

시민 작가

 

 

서울책보고(이하 ‘책보고’)는 내가 요즘 애용하는 서점이다. 성내동에 사는 나는 1시간을 걸어서 잠실나루역에 위치한 책보고에 도착한다. 때론 지하철을 타기도 하지만 걷기 운동을 가장 좋아해서 일부러 걷는 것을 택할 때가 많다. 걷는 동안 나는 고민거리를 잔뜩 안고 하나씩 풀어내며 서점으로 향한다. 서점에 가는 도중에도 나는 독서를 하는 기분이다.


책보고는 2019년 처음 문을 열었다. 책보고의 첫인상은 아주 예뻤다. 둥그런 터널처럼 생긴 책장 안에 많은 책들이 꽂혀 있어 글자로 세워진 집을 보는 느낌이었다. 그 사이를 거니는 기분은 직접 가봐야만 느낄 수 있다. 책보고의 오후엔 창문으로 햇살이 가득 쏟아지고, 저녁이 되면 노랗고 약간은 주황빛인 조명이 아늑하게 비친다. 한쪽에는 커피를 마시거나 개성 만점 독립출판물을 열람하는 공간과 전시 공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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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창기 책보고는 지금보다 책을 찾기 어려웠다. 하지만 수고로움을 들여 보물 같은 책을 찾는 것도 책보고의 매력이었다. 내가 찾은 책 중에 보물 같은 책은 대학시절 국문과 교수로 재직하셨던, 다독가로 유명했던, 노교수님의 에세이집 <홀로 가는 사람은 자유롭다>라는 책이었다. 현재는 절판되어 책보고가 아니었으면 존재조차도 몰랐을 책으로, 찾고 나서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지식인의 고민에 사고의 자유로움이 더해져 글을 읽으며 사고가 확장되는 느낌을 받았다. 스스로 하는 사유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해주기도 했다.

 

책보고엔 보물 같은 책이 많았다. 책보고의 한쪽 공간에는 전시가 위치했는데, 전시는 책을 좀 더 쉽게 고르게 해주거나, 책을 새롭게 보게 해주었다. 지금까지 가장 기억에 남는 전시는 ‘근현대 여성작가전’이었다. 짙은 감성을 느낄 수 있는 최은영 작가의 소설 ‘쇼코의 미소’와 ‘내게 무해한 사람’이 앞쪽에 배치되어 있는 걸 반가운 마음으로 보고선 박완서, 오정희, 은희경, 구병모 작가의 책을 한 아름 지고 나오는데, 나는 아차, 너무 많이 샀다고 직감했다. 아직까지도 여전히 다 읽지 못한 책들이 있지만, 박완서 작가의 단편 소설들만은 매우 인상 깊게 보았다. 특히 박완서 작가의 단행본 <꽃을 찾아서>에 실린 단편 ‘해산바가지’는 우리 할머니를 볼 때마다 생각나는 소설이다. 소설 속에는 치매 걸린 시어머님이 나온다. 주인공인 며느리가 당시에는 사회적으로 천대받던 딸을 임신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이후 아들을 가졌을 때처럼 시어머니의 태도가 한결같았다. 생명을 귀히 여기는 시어머니가 해산바가지에 밥과 국을 퍼서 정성껏 산모의 건강과 아기의 명과 복을 빌어주었던 것이다. 우리 집 할머니도 치매에 걸려 이상한 말과 행동을 가끔 하시지만, 그 이전까지 아름다운 성품을 지녔던 것을 알기에 할머니를 볼 때마다 이 소설이 내게로 다가와 마음을 사뿐히 밟고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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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보고에는 직관적으로 책을 고르고 싶을 때 도움을 주는 랜덤박스라는 주제별 북큐레이션도 있다. 나는 나의 상황과 마음에 끌리는 큐레이션 박스를 종종 구매했다. 포장이 정성스레 되어 있고, 양질의 도서가 묶여 있다는 것을 알고서 지인들에게 선물하기도 하였다. 엄마와 관계가 안 좋았을 때 ‘엄마가 더 이상 미워지지 않기를 바라는 세상의 모든 딸들에게’라는 랜덤박스를, 시험 기간에 지쳐 있을 때 ‘인디밴드 가을방학 팬이라면, 소장각 에세이’를 구매하며 기운을 북돋우기도 하였다. 가장 마음에 들었던 랜덤박스는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이라는 큐레이션이었다. 그중에서도 심윤경 작가의 <사랑이 달리다>라는 소설을 만났는데, 20대 때 사랑에 목매달았던 내 모습이 떠올라 심란하기도 하면서 즐거웠다. 주인공이 위험천만하여도 자신만의 사랑을 택한 것에 속 시원한 감정이 들기도 하였다. 시간 낭비라고 생각했던 나의 애탔던 시간들 하나하나가 다 소중한 경험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보니, 한 시절을 보상받은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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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동안 책보고에 다니며 여러 보물 같은 책들을 만났다. 책보고에는 좋은 책을 만나려는 사람들이 오늘도 들락거린다. 책보고에 있는 헌책은 모두 빛바랜 물건이지만, 독자는 분명 책의 바랜 빛을 찾아준다. 책의 빛을 찾아주는 순간, 독자 자신의 빛도 반짝거릴 것을 믿는다. 날씨 좋은 날 책보고에 다시 들릴 것을 기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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