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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 03

INSIDE

[세렌디피티] 1991년, 그해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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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 서울연구데이터서비스 사이트(http://data.si.re.kr/collection/view/374)

 

Serendipity 

 뜻밖의 재미 혹은 운 좋은 발견

 

 

1991년, 그해 여름

 

 

 

 

초여름을 앞둔 5월의 끝자락 세렌디피티에서는 30년 전 여름, 누군가가 전한 생일축하 메시지를 소개해보려고 해요. 

1991년 당시 초판이었던 소설책 한 권과 당시 개정 9판까지 찍은 인문교양서 한 권에 적힌 메시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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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은 1987년 못지않게 혁명적인 해였어요. 『대중과 폭력: 1991년 5월에 대한 기억』을 쓴 사회운동 연구자 김정한에 따르면, 1991년 5월은 1987년 6월 항쟁 이후 최대 규모의 거리 시위가 벌어진 때로 ‘제2의 6월 항쟁’으로 불렸다고 합니다. 그는 1991년 5월을 제대로 성찰한 후에야 이후 우리 대중운동이 의미 있는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만큼 1991년 5월은 우리 정치사에 중요한 때였어요. 

그래서인지 1991년 6월, 소중한 이에게 책을 선물한 두 명의 주인공이 픽한 책은 그 당시 독서인들의 색깔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1.

『철학에세이』, 편집부, 1983년 초판/1991년 개정 9판, 당시 3,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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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철학이 사치품이 아니라 삶의 나침반이라고 말하는 책인데요. 지금까지도 개정을 거듭해 출간되면서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어요. 특히 8-90년대라는 시대적 특성을 반영해 ‘변증법적 유물론’을 쉽게 해설한 책으로 잘 알려져 있죠. 당시에는 이런 철학책을 출판하는 것조차 위험한 일이어서, 저자는 그 이름을 감춘 채 지은이 이름에 ‘편집부’를 새겨 넣을 수밖에 없었답니다. 지금은 ‘조성오’라는 저자 이름이 정확히 기재되어 출판되고 있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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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 책 앞에는 어떤 생일축하 메시지가 적혀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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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이에게


생일을 축하하며

그리고 또 무슨 얘길 하지?

언니는 문정이가 아주 주체적 (그리고 당찬) (너무 어렵나?)인

인간이 됬음 좋겠다.

이건 내 소망이기도 하고

그럼 남은 우리의 인연을 잘 보내자꾸나


- 선정 – 1991.6.4.


요즘은 생일이라고 이렇게 메시지를 적어 책 선물을 하는 일이 드물죠? 그런데 1991년에는 선물하고 싶은 책 한 권을 소중히 골라 저렇게 진지한 메시지를 적어 건네는 일이 흔했던 것 같아요. 지금이라면 축하 메시지에 넣을 것 같지 않은 ‘주체적 인간’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도 눈에 띕니다. 상대방을 향한 소망이 주체적이고 당찬 인간이라니! 91년의 사람들은 서로를 향해 큰 기대를 품었다는 게 왠지 뭉클하네요.


2.

『그해 여름』, 김하경, 1991년 초판, 당시 4,2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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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의 책만큼이나 91년다운 책이죠. 이 책은 제3회 전태일문학상 수상 작품집인데요. 지금까지 이어져 오는 전태일문학상의 3회 최우수 당선작 김하경의 장편소설 ‘그해 여름’이 두 번째 책입니다.


여기서 잠깐 전태일 문학상의 의의를 한 번 살펴볼까요.


“전태일이 스스로를 노동해방, 인간해방의 횃불로 불사르면서 외쳤던 이 피맺힌 절규들은 오늘도 우리들 가슴 속에서 뜨겁게 고동치고 있습니다. 노동이 있고 싸움이 있는 곳이라면 그 어디에서나 폭풍처럼 해일처럼 메아리치고 있습니다. 죽음마저도 넘어서 버린 전태일의 불꽃은 바로 '인간선언'의 불꽃이었습니다. 불의의 힘이 아무리 강하더라도 그리하여 그것이 아무리 인간을 억누르고 소외시키고 파괴한다 할지라도, 인간은 끝끝내 노예일 수 없으며 기필코 일어서 스스로의 주체적 삶을 실현시키기 위해 싸울 수밖에 없다는 진실을 밝힌 인간 선언의 불꽃이었습니다. 전태일 기념 사업회에서는 노동해방, 인간해방의 횃불을 높이든 전태일을 기념하고자 '전태일 문학상'을 제정합니다. 우리는 인간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모든 불의에 맞서 그것을 이겨내려 노력하는 모든 사람, 모든 집단의 목소리를 한데 모으려는 뜻에서 제정된 이 전태일 문학상이 노동운동을 그 핵심으로 하는 우리의 민족민주운동과 문학운동에 새로운 활력과 힘찬 응원가로 자리 잡을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전태일 문학상이 공장에서, 농촌에서, 학교에서, 각각의 삶터와 일터에서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든 사람들이 함께 참여하고 함께 나눠 갖는 문학상이 될 수 있도록 많은 분들의 관심과 격려를 부탁드립니다.” 

 

1988년 3월 전태일기념사업회


조금 길지만, 그 의미가 참으로 깊고 넓어 다 적어보고 싶었어요. 오늘 이 귀한 책 앞표지에 쓰여 있는 편지는 어떤 내용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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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장

언제나 어느 곳에서든지

사랑받고 지도하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

생일 축하한다.


91년 6.11 한재


이 책을 선물하며 한재 씨는 ‘견장’(애칭인 것 같습니다.)에게 언제 어느 곳에서나 사랑받고 지도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고 있어요. 앞에 선정 씨가 문정 씨에게 주체적이고 당찬 인간이 되기를 소망한 것만큼 큰 소망이죠? 사랑받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지도하는 사람에까지 이르기를 바라는 마음. 아마도 한재 씨는 ‘견장’님을 많이 아끼셨던 것 같습니다. ‘견장’님을 위해 전태일문학상을 고르며 한재 씨는 그가 널리 이웃과 사회를 품는 사람으로까지 성장하기를 바랐던 것은 아니었을까 가만히 짐작해 봅니다.



1991년, 그해 여름에는 이렇게 시대를 상징하는 책에 생일을 축하하며 서로를 기대하는 소중한 마음을 담는 사람들이 있었네요. 이 편지를 보면서, 혹시 당신 곁의 소중한 사람들이 떠오르셨나요? 그렇다면 2021년의 책 한 권 골라 편지를 써서 선물해보면 어떨까요.

 

 

 

 

글 박혜은

사진 박혜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