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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 02

INSIDE

[세렌디피티] 비 오는 날과 맑은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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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endipity 
뜻밖의 재미 혹은 운 좋은 발견
 
비 오는 날과 맑은 날
 

 


옛날 시집은 세렌디피티의 보고(寶庫)입니다. 그래서 저는 틈날 때마다 80년대와 90년대 시집이 많이 꽂혀 있는 서가를 서성이는데요. 때로는 시집 랜덤박스를 만들기 위해, 때로는 생년문고에 넣을 책을 찾기 위해 시집 서가에 오래 머물러 있곤 합니다. 그럴 때마다 발견하게 되는 건, 북큐레이션 박스에 넣을 책이 아니라, 바로 세렌디피티에 소개할 메모가 가득 적힌 시집들이죠. 

그렇게 모은 시집이 데스크 서가 한 칸 가득. 오늘은 그중 가장 아끼는 두 권을 꺼내 그 속에 숨은 메모를 여러분께 보여드리려고 해요.

 

먼저, 보여드릴 시집은 1994년 출간된 황인숙 시인의 『우리는 철새처럼 만났다』(문학과 지성사)입니다. (청계천서점 3,000원) 

특별히 이 시집을 고른 이유는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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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집 앞표지를 넘기면 바로, 이런 메모가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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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4.8 土

흐리고 비 오는 밤.

종로서적에서 사다.

지금은 Levi’s (옛. 던킨도너츠 건물)

가 보이는 Hardee’s 2층 창가.

신호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보인다.

나도 그를 기다리고 있다.

Han.



서울책보고 웹진 e-책보고 4월호에 어울리는 4월의 메모가 적혀있는 사랑스러운 시집.

이 메모에 따르면, 26년 전 4월 종로 거리에는, 종로서적이 있고, 청바지를 파는 리바이스 매장이 있으며, 햄버거를 파는 하디스가 있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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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0년대 종로2가 사진은 아닙니다. 왼쪽 위의 건물이 하디스가 있던 건물입니다.

 (이미지 출처 : 서울시 사진기록화사업 2010, 서울특별시, 서울연구데이터서비스 사이트

(http://data.si.re.kr/psearch?keys=%EC%A2%85%EB%A1%9C2%EA%B0%80&or=&phrase=&negative=))


종로서적은 그 역사가 깊습니다. 1907년 종로에서 ‘예수교서회’라는 이름의 기독교 서점으로 시작해 교문서관, 종로서관으로 이름이 달라지다가 1963년부터 종로서적이 되었죠. 2002년, 문을 닫을 때까지 대한민국에서 가장 오래된 서적이었던 종로서적은 80년대에 광화문 교보문고와 종로1가 영풍문고가 개장하기 전까지는 학생들이나 직장인들이 자주 찾던 핫플레이스였다고 해요. 2000년대 이후에는 인터넷 서점들에 밀려 문을 닫게 되었지만 70, 80년대에는 ‘젊은이의 거리’ 종로의 명물로 사랑받아온 대한민국 1호 서점입니다.

 

오늘 메모의 주인공 Han은 그 종로서적에서 연인으로 보이는 ‘그’를 기다리며 흐리고 비 오는 4월의 어느 토요일 밤, 시집을 한 권 삽니다. ‘그’보다 약속 시간에 일찍 나온 Han은 하디스 2층 창가에 앉아 신호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보며 방금 산 시집에 자신의 감상을 적어내려갑니다. 그 풍경이 눈앞에 그려지는 것 같지 않나요?

비에 젖어 불투명해진 창문 너머로 거리 풍경을 내려다보며 시집에 메모를 적는 Han.

시집의 메모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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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내 마음에 깃발을 꽂았다.

 

Han은 이 시집을 다 읽고, 그에 대한 소감으로 이 한 문장을 남긴 걸까요? 

아니면 시집을 읽던 어느 날, 문득 이 메모를 남긴 걸까요? 궁금해집니다.

 

 

 

*


 

두 번째 시집은 1986년 초판이 나오고 1997년 12쇄를 찍은 김용택 시인의 『맑은 날』(창작과 비평사)입니다. (청계천서점 3,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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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집에는 연서가 한 통 들어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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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90년대에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편지를 써서 시집에 넣었던가 봅니다. 

그것도 쓰다만 편지네요... 이 또한 너무 시적이네요. 그럼, 편지의 한 구절 살짝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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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사랑하는 사람!

어제 근무 서고 오전 중에 잘 쉬었는지...?

핸드폰 그 녀석 배고파서 기절했겠네.

오늘은 정말 추워.

교무실에도 창가에서 볕이 들오는 곳을 빼면 썰렁썰렁해.


날씨가 춥던 어느 날, 조금은 서늘한 교무실 안에서 연인을 생각하며 편지를 썼을 (아마도) 선생님은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계실까요? 

이십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학교에서 근무하고 계실까요? 이 편지는 왜 쓰다 만 편지가 되어 (아마도) 건네지 못한 시집 속에 고이 잠들어 있게 됐을까요? 여러 궁금증이 일고, 이런저런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편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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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을 향해 ‘사랑하는 사람’이라 부르는 호칭이 지금에 와서는 낯선 고대유물처럼 느껴지지만 한편 한 번쯤은 들어보고 싶은 표현이기도 합니다. ‘핸드폰 그 녀석 배고파서 기절했겠네’라는 표현 또한 지금은 누구도 쓰지 않을 옛스러운 은유지만 이마저도 정겹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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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 두 마리가 어항 속에서 입맞춤하는 편지지 일러스트는 또 어떻고요. 

한때 문방구를 점령했던 알록달록한 편지지... 요즘 다시 유행이더라고요.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이 시집에는 연서와 함께 책갈피가 하나 꽂혀 있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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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매달 발행되는 <좋은 생각>에서 만든 것 같은 책갈피에요. 

1992년에 창간한 <좋은 생각>. 이 책갈피에는 발행인 정용철 님의 글이 적혀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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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날’ 산 시집과 제목이 ‘맑은 날’인 시집 두 권을 나란히 소개하고 보니, 비가 오는 날이나, 맑은 날이나 시를 사랑했던 90년대 사람들을 떠올리게 됩니다. 90년대 연인의 하루를 잠깐 상상해볼 수 있었던 두 권의 시집. 서울책보고에 오시면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글 박혜은

사진 박혜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