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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 16

SPECIAL

[헌책보고 고전보고] 헌책방의 소중한 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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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츠제럴드와 헤밍웨이가 사랑한 프랑스 파리의 서점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의 간판(출처 경향신문)

 

<헌책보고 고전보고> Ep. 6

헌책방의 소중한 들러리

 

키두니스트(Kidoonist)

웹툰 작가,  편식하는 독서가

 

Emotion Icon <헌책보고 고전보고>는 헌책과 고전문학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를 전하는 코너이며,

 매 호 독자들을 만나러 옵니다. 

 

 


종이책이 널리 보급된 이후 책은 비교적 수월하게 대중의 지적 욕구와 흥미를 채워주는 도구가 되었다. 항상 빳빳한 새 책을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니,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않은 사람들은 중고 책을 찾아 거리 한쪽을 기웃거리게 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삶의 화폭은 고전소설 속에도 들어있다. 에드거 앨런 포가 창조한 최초의 탐정 캐릭터, 오귀스트 뒤팽을 살펴보자. 시리즈 시작 시점에 뒤팽은 가문이 몰락하여 극히 빈곤하게 살고 있다. 빈곤한 와중에 책은 그가 부릴 수 있는 유일한 사치이다. 새 책이든 낡은 책이든, 뒤팽의 입장에서 책이란 파리 어디서나 구할 수 있는 작은 즐거움인 것이다. 그리고 책은 뒤팽의 인생에 큰 전환점을 마련한다. 그가 골라든 낡고 희귀한 서적을 우연히 다른 사람이 동시에 골랐는데, 그 사람과 뒤팽은 곧 왓슨과 홈스 같은 파트너가 되기 때문이다. 시리즈의 서장을 장식하는 이 장면은 뒤팽 본인에게도 잊을 수 없는 추억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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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두니스트

 

뒤팽처럼 극적이지는 않더라도, 낡은 책은 많은 사람에게 어떤 기억을 만들고 상상력을 자극하는 도구이다. 그러한 책들이 모인 헌책방은 그 자체로 드라마성과 향수를 지닌다. 다만 2020년대의 젊은이들은 작고 오래된 헌책방을 방문한 경험이 거의 없다시피 하다. 헌책 자체의 수요가 줄어들기도 하였고 그나마도 온라인 중고 책 판매가 성행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난날 청계천, 대학가 등지에 헌책방이 성행할 때는 어땠을까?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싼값에 원하는 책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협소한 책방 안을 부산스레 드나들었을 것이다. 비싼 전공 서적을 중고로 구하려는 대학생도 심심찮게 왔을 것이다. 독서 연차가 상당한 어르신들이 새로운 책을 찾으러 기웃거리기도 하셨을 것이다. 아이가 좋아하는 만화책을 구하려는 부모도 있지 않았을까? (필자의 부모님이 그러셨다) 또 한편으로는 희귀한 절판도서를 구하려는 ‘책 사냥꾼’들이 눈에 불을 켜기도 했으리라. 때론 순수하게 활자가 좋아서 책 구경을 온 학생이나 헌책 냄새에서 기쁨을 누리는 방문객도 있었을 것이다. 자연스레 책방 안에는 그네들의 삶과 기억이 헌책과 함께 뒤섞여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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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70년대 청계천 헌책방 거리의 200여 개의 헌책방에는 하루 평균 2만여 명이 드나들었다. 

지금은 20여 개의 헌책방이 명맥을 유지 중이다.

 

 

그러나 헌책방에서 그들을 맞이하던 것이 책뿐만은 아니었다. 종이 냄새가 밴 책방에는 한결같이 그 자리를 지키던 사물들도 있었다. 책더미를 묶는 질긴 끈, 높은 책장의 책을 꺼낼 때 쓰는 사다리, 책에 쌓인 먼지를 털어내는 솔 같은 것들 말이다. 하나같이 책을 관리할 때 필수 도구인 셈이다. 서점에 따라서는 좀 더 큰 사물들을 생각할 수도 있다. 어떤 곳에는 가게 한편에 구식 난로가 있어 추운 겨울날 그 근처에 가면 온기가 피어올랐을 것이고, 어떤 곳에는 낡은 가죽 소파 한두 개가 놓여 있어 잠시 활자를 읽고 쉬어가는 사람의 휴식처가 되었을 것이다. 이들은 비록 헌책방의 주인공이 아닌 들러리이지만, 사람의 추억을 환기하는 데에는 때로 사소한 것들이 큰 역할을 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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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두니스트

 

또 이런 건 어떨까? 아주 작고 소소한 물건들이 눈에 띄지도 않은 채 헌책방 책장에 숨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누군가 책에 끼워만 두고 잊어버린 꽃잎이나 낙엽, 회수권, 티켓 등을 생각해 보자. 그렇게 무언가를 품은 책이 어느 헌책방으로 팔리면 책갈피 속 물건들은 한참 뒤에야 다른 이에게 다시 발견될 것이다. 때로는 책방 주인의 손에, 때로는 책을 다시 구매한 손님의 손에 발견되어 그 책을 되새기는 표식이 될 것이다. 혹여나 그 책이 절판 본이라면, 이제는 구할 수 없는 책 속에 이제는 구할 수 없는 표식만이 남는 것이다. 참으로 기억할 만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출판 기술이 발달하고 책의 형태 역시 아름답게 변해가는 요즘이다. 이런 세상에서 헌책방을 생각하면 왠지 신동엽 시인의 ‘오래지 않은 옛날’의 ‘전설 같은 풍속’이라는 시구가 떠오른다. 

 

 

향아

 

신동엽

 

 

향아 너의 고운 얼굴 조석으로 우물가에 비최이던 오래지 않은 옛날로 가자

 

수수럭거리는 수수밭 사이 걸쭉스런 웃음들 들려 나오며 호미와 바구니를 든 환한 얼굴 그림처럼 나타나던 석양.......

 

구슬처럼 흘러가는 냇물 가 맨발을 담그고 늘어앉아 빨래들을 두드리던 전설 같은 풍속으로 돌아가자

 

눈동자를 보아라 향아 회올리는 무지갯빛 허울의 눈부심에 넋 빼앗기지 말고 철 따라 푸짐히 두레를 먹던 정자나무 마을로 돌아가자

미끄덩한 기생충의 생리와 허식에 인이 배기기 전으로 눈빛 아침처럼 빛나던 우리들의 고향 병들지 않은 젊음으로 찾아가자꾸나

 

향아 허물어질까 두렵노라 얼굴 생김새 맞지 않는 발돋움의 흉낼랑 고만 내자 들국화처럼 소박한 목숨을 가꾸기 위하여 맨발을 벗고 콩바심하던 차라리 그 미개지에로 가자 달이 뜨는 명절 밤 비단 치마를 나부끼며 떼 지어 춤추던 전설 같은 풍속으로 돌아가자 냇물 굽이치는 싱싱한 마음밭으로 돌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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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두니스트(Kidoonist)

웹툰 작가, 편식하는 독서가

 

세계적으로 유명한 고전 문학, 그중에서도 장르 문학 위주로 읽는 습관이 있다. 

인터넷 커뮤니티 등에서 40여 권의 책을 만화로 리뷰했으며 누적 조회 수 80만 회를 기록했다. 

수입의 상당 부분을 책 사는 데에 쓰고 있으며 언젠가 개인 서재를 갖고픈 꿈이 있다. 

현재는 좁은 공간에서 SF와 추리물, 그 외 장르를 어떻게든 분류하고 있다. 

영국 여행 중 셜록 홈즈 박물관과 해리 포터 스튜디오를 가봤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낀다. 

지은 책으로 《고전 리뷰툰》이 있다.

 

 

 

 

 

섬네일 : 미국 TV영화 Murders in the Rue Morgue(모르그가의 살인 사건) (1986)의 한 장면
출처 : IMDB https://www.imdb.com/title/tt0091574/mediaviewer/rm622131712/?ref_=tt_md_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