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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 14

SPECIAL

[헌책보고 고전보고] 듣는 시(詩)와 읽는 시(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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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보고 고전보고> Ep. 4

듣는 시(詩)와 읽는 시(詩) 

 

키두니스트(Kidoonist)

웹툰 작가,  편식하는 독서가

 

Emotion Icon <헌책보고 고전보고>는 헌책과 고전문학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를 전하는 코너이며,

 매 호 독자들을 만나러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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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오디오북 플랫폼을 통해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멋진 시 낭송을 즐길 수 있다.

 

 

해외 문학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나는 오디오북을 자주 듣는 편이다. 외국어를 전부 알아듣지는 못하지만, 그저 틀어놓는다는 것만으로 좋을 때가 있다. 성우가 유려한 발음으로 들려주는 문학은 그 자체로 ASMR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틀어놓고 듣는 콘텐츠는 소설일 때도 있지만 시일 때도 많다. 운문이라는 특성상 시는 혼자 읽을 때보다는 누군가가 읽어줄 때 더욱 가락이 살고 흥겹기 마련이다. 이것을 즐기기 시작한 계기는 단순하다. 우연히 시를 오디오북으로 들을 수 있다는 걸 알았을 때였다. 그렇다. 현대인이라면 오디오북을 활용해 언제 어디서나, 원하는 시 낭송을 들을 수 있는 것이다. 에드거 앨런 포의 갈까마귀를 크리스토퍼 리의 묵직한 목소리로 들으며 나는 참 좋은 시대에 태어났음을 실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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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키두니스트 Kidoonist

 

헌데, 나는 영문학을 좋아하는 탓에 영시를 주로 듣지만, 한국 시도 오디오북이 있을까? 시험 삼아 나태주의 시를 검색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수두룩하게 나온다. 이렇게나 쉽게 좋은 시를 낭독으로 접할 수 있다면 구태여 시집을 살 일이 없을 것만 같다.

여기서 소소한 세대 차이가 생겨난다. 우리네 부모님 세대라면 시를 좋아하시는 어머니, 아버지들은 응당 시집을 사셨을 것이다. 시를 원할 때 바로 읽고 즐기려면 시집을 사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좋은 시라고 전부 외우고 다닐 수는 없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나 또한 오디오북을 접하기 힘든 세대였다면 꽤 많은 시집을 충동적으로 구입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시대를 살아가는 내게 있어 시집은 정말이지 ‘구태여 사는 물건’에 불과하다. 그나마 소설은 스토리가 명확하여 꾸준히 읽을 가능성이 있으나, 시는 이따금 몇 장씩만 훑어보기 때문이다. 

 

요는 시집 자체가 절판된 추억 속 물건으로 남거나, 혹은 언제 절판될지 모르는 물건이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시는 소위 말하는 하이엔드 문학이며 옛날부터 비교적 소수의 독자만 즐기는 콘텐츠이기는 했다. 다만 오늘날엔 특히나 가혹해졌을 따름이다. 2020년대에 시를 즐기는 문학청년이 간혹 있더라도 종이로 된 시집보다는 간편한 오디오북을 이용하지 않을까? 이대로라면 시집은 영영 사라지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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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털사이트를 통한 간단한 검색으로 한국 시들도 오디오북으로 즐길 수 있다. 


 

바로 위 문장은 다행히도 당분간은 웃어넘길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영상 매체를 넘어서 VR까지 개발된 이 시대에도 종이책이 건재한 것을 보면 말이다. 기술과 시대는 제멋대로 진보해 가지만 사람들의 가슴에는 어떤 고집이 남아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구태여 이 시대에도 종이책을 쟁여놓고는 책장 공간이 부족하다며 쩔쩔매는 것이다. 당장 내 빽빽한 책장 속에는, 평소 애정 하던 앨런 포의 시집 이외에도 알라딘 사은품에 혹해서 사온 바쇼의 ‘하이쿠’ 시집과 앙리 마티스의 삽화에 혹해서 사온 보들레르의 《악의 꽃》시집이 버젓이 꽂혀 있다. 구매 사유가 참으로 얄팍하지만, 이런 얄팍한 계기로 지식을 쌓는 일도 빈번하므로 독자님들은 이해해주시기를 바란다. 게다가 책을 구매하는 이유는 본질적으로 그 작가와 작품을 가까이서 느끼고 싶어서다. 나는 사은품과 더불어 그 유명한 바쇼의 글을 집에다 두고픈 마음에 하이쿠 시집을 구입했다. 마찬가지로, 난해하기로 소문난 보들레르의 글을 마티스의 삽화와 더불어 감상하고자 《악의 꽃》을 구입했다. 그리고 문자 그대로 ‘구태여’ 사 온 이 두 권 덕에 나는 외국의 훌륭한 운문을 직접 만지며 보관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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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키두니스트 Kidoonist


예나 지금이나 인생의 어느 시점에 시를 즐기다 현실에 파묻혀 그 시를 멀리하게 된 사람은 있었다. 그런 사람이 나이가 들어 우연히 헌책방에서 절판된 시집과 재회하는 것을 상상해 보자. 그는 좋은 시, 좋은 시절을 기억하며 미소 짓고, 잠시나마 현실을 넘어 추억의 세계로 빠져들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낡은 시집은 훌륭한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당신이 좋아하는 그 시가 여전히 종이에 인쇄되어 존재함을 감사하자. 더불어 그 시를 청아한 목소리로 읽어주는 매체가 새롭게 활성화된 데에도 감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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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시집들이 서울책보고 '행운서점' 서가에 빼곡하게 꽂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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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두니스트(Kidoonist)

웹툰 작가, 편식하는 독서가

 

세계적으로 유명한 고전 문학, 그중에서도 장르 문학 위주로 읽는 습관이 있다. 

인터넷 커뮤니티 등에서 40여 권의 책을 만화로 리뷰했으며 누적 조회 수 80만 회를 기록했다. 

수입의 상당 부분을 책 사는 데에 쓰고 있으며 언젠가 개인 서재를 갖고픈 꿈이 있다. 

현재는 좁은 공간에서 SF와 추리물, 그 외 장르를 어떻게든 분류하고 있다. 

영국 여행 중 셜록 홈즈 박물관과 해리 포터 스튜디오를 가봤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낀다. 

지은 책으로 《고전 리뷰툰》이 있다.

 

 

 

 

 

섬네일 : 영화 <라붐> (1980)의 한 장면 © 다음영화 https://movie.daum.net/moviedb/contents?movieId=10117#photoId=356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