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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 13

SPECIAL

[개관 3주년] 변치 않는 것들로 가득한 공간이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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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 3주년 특집

변치 않는 것들로 가득한 공간이 되길


김연수

소설가

 

 


이상李箱은 외국으로 가 문인으로서 큰 뜻을 펼치겠다는 포부를 피력하며 1936년 부산에서 일본행 여객선에 올라탔고, 시모노세키에 상륙한 뒤에는 기차를 타고 도쿄로 향했다. 갈아타는 시간을 빼고 이동시간만 44시간이 걸리는 먼 길이었다. 그렇게 도착한 도쿄에서 김기림에게 “기어코 동경 왔오. 와 보니 실망이오.”라고 시작하는 편지를 보낸 건 유명한 일화다. 이듬해 4월 병사하기까지 이상은 도쿄 체류 경험을 소재로 여러 편의 소설을 남겼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실화失花》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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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 이상李箱의 사진(출처 : 한국현대문학대사전, 클릭 시 이동), 

▶ (오른쪽) 《실화失花》의 전자책 표지 이미지(출처 : 네이버책, 클릭 시 이동

 

‘실화’란 제목은 언뜻 듣기에 실제 일어난 일이나 실수로 인한 불처럼 들리지만, 한자 그대로 읽으면 ‘잃어버린 꽃’이나 ‘꽃을 잃어버리다.’라는 뜻이 된다. 이상 본인이 그대로 등장하는 이 실명 소설은 1936년 12월 23일, 어떤 여성에게 받은 하얀 국화 한 송이를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다음날 새벽 깨닫게 되기까지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하지만 이상이 잃어버린 것은 꽃만이 아니다. 그는 일본에 건너갈 때 품었던 드높았던 꿈도 이날 완전히 잃어버렸다. 도쿄의 유학생들을 만나면서 자신의 꿈이 얼마나 무모한 것인지 비로소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화>에서 가장 내 눈에 띈 것은 다음과 같은 장면이었다. 

 


NAUKA사*가 있는 진보초 영란동에는 고본 야시**가 선다. 

섣달 대목—이 영란동도 곱게 장식되었다. 

이슬비에 젖은 아스팔트를 이리 디디고 저리 디디고 저녁 안 먹은 내 발길은 자못 창랑하였다. 

그러나 나는 최후의 이십전을 던져 타임스판 상용영어 사천자라는 서적을 샀다. 

사천자—사천자면 참 많은 수효다. 

이 해양만한 외국어를 겨드랑이에 낀 나는 섣불리 배고파할 수도 없다. 

아—나는 배부르다.

 

* 일본에 있었던 러시아어 전문 서점

** 오래된 책 야시장

 


가난한 식민지 시인 이상에게 마지막 남은 돈 이십전이 당시의 화폐 가치로 어느 정도의 액수를 말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다지 비싼 가격은 아니리라. 도쿄의 고서점가인 진보초에 가면 지금도 러시아서적 전문서점인 나우카서점을 비롯해 근사한 헌책방들을 볼 수 있다. 서점마다 바깥에 내놓은 염가 중고본들을 살펴보면 싼값에 파는 영어교재들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도쿄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던 이상의 가난한 마음이, 어쩌면 안식이라고 해야 할 포만감을 얻은 곳이 바로 그곳 진보초였다. 이상이 책벌레였는지, 어떤 책들을 감명깊게 읽었는지에 대한 자료는 전혀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헌책방 거리에서 포만감을 얻었다는 이 일화 하나만으로도 나는 그를 친구처럼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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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 180개의 고서점이 모여있는 일본 대표 고서적 거리인 '진보초'(출처 : 일본 여행 사이트, 클릭 시 이동)

 

대학에 입학해 서울에 올라온 나 역시 주말이 되면 동대문 헌책방 거리를 쏘다니곤 했다. 그 시절엔 같이 시간을 보낼 만한 친구도 없었고, 혼자서도 재미있게 놀만큼 돈도 없었다. 그런 내게 동대문 헌책방 거리는 공짜로 책을 구경하면서 시간을 보낼 수 있고, 또 운이 좋으면 흥미로운 책을 싼값에 살 수 있는 곳이었다. 책을 사면, 또 그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낼 수 있으니 헌책방 거리 산책은 외로운 서울 생활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일정이었다. 그래서 동네책방과 헌책방들이 사라질 때마다 나는 외로운 사람들은 이제 어디로 가나, 하는 쓸데없는 걱정을 했더랬다. 하루 종일 영화와 드라마를 보여주는 스마트폰이 있는 세상이니 쓸데없는 걱정이 맞다. 하지만 가끔은 스마트폰으로는 마음이 채워지지 않을 때가 있다. 말하자면 포만감의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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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현재에도 청계천 헌책방 거리는 여전히 우리들 곁에 자리하고 있다.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으며 또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가? 나의 주변에는 어떤 사람들이 있는가?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면서 살고 있는가? 지금 나는 행복한가? 이런 게 바로 포만감의 문제다.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면서 사는 것, 좋아하는 사람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 우리 모두가 함께 행복해지는 것 등은 세상의 변화와는 무관한, 변치 않는 삶의 가치들이다. 우리 곁에서 변하지 않고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들을 볼 때마다 그 가치들을 생각한다. 그처럼 책의 가치는 여전할 것이고, 오래 전 이상처럼 작은 책 한 권에서 마음의 포만감을 느끼는 젊은 시인도 항상 우리 곁에 존재할 것이다. 

 

서울책보고가 개관 3주년을 맞이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서울책보고가 변치 말고 그 자리를 지킬 뿐만 아니라 더 많은 곳으로 뻗어나가 서울 시민들의 마음을 살찌울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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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연수

 소설가

  

경북 김천에서 태어나 성균관대 영문과를 졸업했다. 

1993년 《작가세계》여름호에 시를 발표하고, 

1994년 장편소설 『《가면을 가리키며 걷기》로 제3회 작가세계문학상을 수상하며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이상문학상, 동인문학상, 황순원문학상 등을  수상한 대한민국 대표 작가이며,

《일곱 해의 마지막》,《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사월의 미, 칠월의 솔》,《청춘의 문장들》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