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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 13

SPECIAL

[개관 3주년] 헌책방 주인의 숙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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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 3주년 특집

헌책방 주인의 숙제



노동환

참여헌책방 '숨어있는책' 대표  

 

 

헌책방을 다닌 지가 사십오 년은 넘은 것 같다. 초등학교 때, 근처 중학교 앞 헌책방 중 하나가 첫 헌책방이었다. 세 곳이나 모여 있었다. 이제는 동네에서 사라진 풍경. 처음 산 책이 자유 교양 문고였던 것 같은데, 기억이 흐릿하다. 6가부터 8가까지 줄지어 있던 1980년대의 청계천 책방들. 처음 그 거리에 섰을 때의 흥분이 지금도 느껴진다. 지방에 가게 되면 헌책방이 어디에 있는지부터 묻곤 했다. 

부산, 광주, 대구, 인천, 대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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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2년 평화시장 완공과 함께 1층에 헌책방들이 입주했고,  1970년대 최대 전성기를 지나 1980년대부터 수요가 급감했다.

(사진_위) 1960년대 청계천 책방거리 전경(출처 : 국가기록원)

(사진_아래) 인천 배다리 헌책방거리의 한 서점. 아직 전국 곳곳에 헌책방거리가 있다. (출처 : 최종규) 

 

 

1990년대까지의 동네 헌책방은 크기나 구성이 대부분 비슷했다. 십여 평 남짓한 크기가 평균이었을까. 작게는 두 평, 크게는 삼사십 평 정도의 헌책방도 있긴 했다. 벽면을 가득 채운 책꽂이와 쓰러질 듯이 쌓여 있는 책들. 책 더미를 뒤지는 것이 즐거웠다. 느닷없이 마주치는 기쁨. 첫 번째 책꽂이부터 마지막 것까지 꼼꼼히 살폈다. 어떤 책이 어디에 있을지 모르니까. 사전, 참고서류만 따로 있고, 책들이 대부분 섞여 있었다. 시간이 없을 때는 눈길이 조급해졌다. 다 둘러봐야 직성이 풀렸으니까. 거칠게라도 분야가 나뉘어 있는 헌책방을 만나면 반가웠다. 책이 특히 많은 곳에서는 불편함을 감수해야 했다. 책꽂이 사이가 좁은 곳, 책을 책꽂이 앞에 두세 줄씩 쌓아놓은 곳에서는 상자에 들어가는 곡예사처럼 몸을 구겼다. 심지어 책꽂이 사이 복도에 책을 깔아놓은 곳도 보았다. 마음이 불편했다. 이렇게 밟고 있어도 되나? 책들아 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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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마포구 신촌 어느 골목에서는 이름 그대로 숨어있는 헌책방 '숨어있는책'을 만날 수 있다.  

 

1999년에 ‘숨어있는책’을 열었다. 경험과 주위의 조언으로 몇 가지 방침을 세웠다. 분야별로 나누자. 쌓아놓지 말자 등. 장서량이 삼사 만 권일 때까지는 그럭저럭 지켰다. 헌책방 속성상 나가는 책보다 들어오는 책이 훨씬 많았다. 그리고 들고나는 책의 분야가 달랐다. 장르별, 작가별, 연도별로도 나뉘었던 책들은 점차 뒤섞였다. 책꽂이에 꽂기 전 잠시 쌓아놓았던 책들은 점차 늘어나 책꽂이의 절반 가까이를 가렸다. 지금은 못 푼 책 상자들이 복도 세 개를 막아버렸다. 그 와중에서 책을 고르고, 계속 찾아주는 우리 손님들이 고맙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아직도 헌책방이 있다면서 들어와 슬쩍 둘러만 보다가 나간다. 쏟아질 듯한 책 더미에 놀랐을까. 십여 전부터 새해 다짐은 쌓인 책을 정리하자이다. 책 더미는 더 높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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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들어오는 책이 많아질수록 책방 주인의 의도와는 달리 책 더미는 자꾸만 높아진다.  

 

인터넷 헌책방이 활기를 띠고, 대형서점의 체인형 헌책방이 늘어났다. 적막한 시간도 늘어갔다. 문화공간을 활성화하고자, 또 어려운 헌책방을 돕고자 서울시와 서울도서관이 나섰다는 소식이 들렸다. 헌책방의 책을 위탁받아 판매해 주는 공간, 서울책보고. 결론부터 말하면 고마웠다. 경제적으로, 훨씬 크게 심정적으로. 헌책방의 존재 의미를 스스로도 살펴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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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책보고는 1,465㎡(443평) 공간에서 약 13만권의 헌책을 판매하는 국내 최초의 초대형 공공헌책방이다. (출처 : 한경닷컴, 클릭 후 이동)

 

서울책보고를 처음 봤을 때 조금 낯설었다. 크고, 느슨했다. 서가 사이 복도를 살짝 좁혀도 괜찮을 것 같은데, 책꽂이는 한두 칸만 크게 두고 나머지는 칸 높이를 줄여 칸수를 늘리는 게 좋을 건데. 헌책방 손님들은 계속 줄고 있는데 이 큰 공간을 유지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도 했다. 그러나 차츰 알게 되었다. 

 '좁고 답답한 공간에 익숙해진 헌책방 주인의 눈으로 보았구나. 사람들은 이런 공간을 원하고 있었구나.'

 

많은 사람이 서울책보고를 방문하는 걸 보았다. 내가 서울책보고에 들를 때마다 우리 책방 손님들을 만나곤 했다. 헌책방들을 성지 순례하듯이 다니는 분들.

"어때요?"

"넓어서 좋다.", "깔끔해서 좋다."라는 대답이 많았다. 

너무 넓어서 어지럽단 분도 있었다. 책 밀림 속에서도 유유했던 분인데... 

책방을 넓혀나갈 때가 생각난다. 계약서에는 열 평이라고 되어 있었지만 실제로는 다섯 평인 곳에서 시작했다. 곧 세 평짜리 옆 공간을 터서 여덟 평. 지하 공간 열일곱 평을 얻어서 합이 스물다섯 평. 그리고 지금의 쉰 평. 공간이 넓어질 때마다 하소연하는 이들이 있었다.

"한눈에 책이 보였는데... 이제는 넓어져서 책 찾기가 힘들어요." 

 

2010년 언저리부터 헌책방계에도 여러 변화가 생겼다. 

크고 깨끗한 체인형, 카페 등 다른 분야와 같이하는 업종 혼합형, 새 책도 함께 다루는 복합형 등.

독자들의 취향이 다양해져서 일 것이다. 쫓아가야 할 것 같았다.

근데, 예전 모습을 좋아하는 손님들도 있는데, 

잘 분류되어 있는 헌책방으로 만들지 못했는데, 

아직 숙제를 못 마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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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넓고 깔끔한 서울책보고를 거친 많은 이들의 발걸음이 동네 헌책방으로 이어지길 바란다.  

 

서울책보고에 입점하면서 마음을 편히 먹었다. 새로운 스타일로 변화하는 건 당분간 협력(?) 공간인 서울책보고에 기대고, 우선은 숙제를 하자. 우리 손님들은 서울책보고를 누리고, 서울책보고로 헌책방을 처음 접했던 이들은 오래된 동네 헌책방을 찾는 모습을 그렸다. 지금은 코로나 시국이라 멈췄지만, 그런 분위기가 있었다. 

서울책보고에서 '숨어있는책'을 알게 돼서 찾아왔다는 손님들. 

반가웠다.  

그분들이 다시 찾아올 수 있게,

작은 헌책방의 묘미(?)를 느낄 수 있게 조금씩이라도 꾸준히 숙제를 해야겠다. 분류와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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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환

'숨어있는책' 대표

 

출판사에서 일하다가

1999년에 신촌 언저리에  헌책방 '숨어있는책'을 열었다. 

주로 문학, 예술, 인문학, 외서 등을 다룰려고 애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