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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 13

INSIDE

[오늘의 헌책] 봄이 먼저 오는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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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BS <김영철의 동네 한 바퀴> 29회 방송 캡처

 

개관 3주년 특집

저 서울책보고 서가 한구석에 오랫동안 숨어있었으나 

누구도 발견하지 못한 헌책의 쓸모와 오늘의 트렌드를 연결하는 새로운 코너

 

 *

봄이 먼저 오는 집 

1955년 5-1《국어》교과서 

 

 

2019327일에 개관한 서울책보고가 벌써 개관 3주년을 맞았습니다! 3주년을 맞아 오늘은 서울책보고의 시그니처이자 어르신 손님들이 가장 많이 찾는 1950년대 #국어책 을 오늘의 헌책으로 가져왔어요.

 

2019년 개관하던 해 여름에, 저희 서울책보고가 KBS1TV <김영철의 동네 한 바퀴>에 소개되었던 것 혹시 아시나요? 그때 그린북스 서가에 모여 있던 1950~60년대 교과서가 방송에 나갔었어요. 그 방송을 보시고 많은분들이 본인이 초등학교 시절 공부하던 교과서를 보려고 서울책보고를 많이 찾아주셨죠.

 

(3년이 지난 지금도 여러 채널에서 재방송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 같더라고요. “내가 어제 김영철의 동네 한 바퀴에서 봤는데... 거기 어떻게 찾아가는 거야?”라며 전화로 문의해주시는 어르신분들이 많은 걸 보면요!)Emotion Icon

 

서울책보고, 하면 옛날 교과서를 떠올릴 수밖에 없어서 개관 기념 오늘의 헌책으로 바로 옛날 교과서를 고른 것이죠. 여러 시대 교과서 중에서 특별히 19555-1 국어 교과서를 고른 이유는 저희가 보유한 교과서 중 이 교과서가 가장 오래 되기도 했고, 어르신들이 유독 <국어> 교과서를 많이 찾으시기도 해서에요. 다른 어떤 과목보다 국어 교과서를 다시 보고 싶어하시는 이유는 뭘까요? 철수와 영희가 보고 싶으셨기 때문일까요?

 

오늘 이 국어 교과서는 1955년 국어,라는 특징 외에 더 특별한 흔적이 남아 있답니다. 그 흔적은 마지막에 공개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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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앞표지를 보면 한 소년이 닭과 병아리에게 모이를 주고, 한 소녀가 토끼에게 뭔가를 주는 듯한 장면이 나와요. 목가적이죠. 유독 50년대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에는 자연과 더불어 노니는 장면과 #병아리 가 많이 등장합니다. 본격적인 교과서 내용 소개하기 전에, 겉장을 넘기자 보이는 저 이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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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O

 

... 몇의 몇으로 자기 학년과 반을 기입하던 방식은 저때부터 시작되었나 봐요! 저도 1학년 3반일 때, 13이라고 썼었는데! (방금 95년생 직원에게 확인해 보니... 이런 방식은 처음 본다고 합니다. ... ... 50년대 초등학생과 통하는 옛날 사람...) 그렇다면 저 몇의 몇기입 방식은 언제부터 명맥이 끊긴 걸까요? 궁금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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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년식 5학년 1학기 국어 교과서의 목차를 한 번 살펴볼까요? 역시 학기가 시작하는 계절이 봄이다 보니, 봄 이야기로 교과서는 시작합니다. , 한국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인지라, 12장과 13장에 싸우는 우리 공군민주주의와 공산주의가 특별히 눈에 띄네요. 이제 막 열 살 넘은 어린이들에게 전쟁과 이념 이야기를 해야만 했던 시대적 분위기가 느껴집니다.

 

첫 장으로 넘겨볼게요. ‘봄맞이라니! 지금 이 계절에 딱 어울리는 내용이 사랑스럽게 적혀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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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먼저 찾아온 집)

 

산골짜기에 길길이 쌓였던 눈이 녹았는가 하면, 어느 틈에 뒷도랑에서는 졸졸졸졸 맑고 찬 물이 흘러가고 있니다.

포근히 내려쬐는 볕이 제법 따뜻하여, 울타리 밑에는 삽살개가 졸고

어미닭은 병아리를 데리고 모이 찾기에 한참 바쁩니다.

긴 겨울 동안 우릿간에 깊이 갇혀 있던 돼지들도, 꿀꿀 꿀꿀 요란스럽게 떠들고 있니다.

멀리 바라보이는 남쪽 바다에서는, 훈훈한 바람이 솔솔 불어 와서

이 나무 저 나무를 고요히 흔들어 깨워, 나무 가지마다 볼록볼록한 어린 싹이 튀어나오고

눈 녹은 땅에서는 파란 풀들이 고개를 쳐들기 시작합니다.

새 소리, 짐승 소리, 바람 소리만 들리는, 산등성이 고개 위에 외따로 자리잡은 수동이네 집에는

어느 틈엔지 벌써 봄이 찾아왔니다.

오빠 수동이와 누이 복희는, 머리가 하얗게 세고 허리가 꾸부러진 할아버지를 좌우(左右)에서 부축하고

자기 집을 찾아온 봄을 두 손으로 맞이하려는 듯이, 문밖으로 나와서 사방(四方)을 휘휘 둘러보고 있니다.

할아버지, 벌써 봄이지요?”

, 그렇구나! 눈보라가 치고 땅이 꽁꽁 얼어붙은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봄이라니……

할아버니께서는 지팡이로 땅을 찔러 보시고는, 남쪽 들판을 바라보셨니다.

할아버지, 봄이 제일 먼저 우리 집을 찾아왔지요?”

아이, 오빠도 별 소릴 다 하네. 봄이 먼저 오는 집이 있나?”

복희는 귀엽게 생긴 얼굴에 방끗 보조개를 지어 가면서 오빠를 쳐다보았니다.

, 저 앞산과 응달진 동네를 봐. 내 말이 거짓말인가?”

수동이는 핀잔을 주면서 앞산을 가리켰니다

하늘 위에 우뚝 높이 솟은 앞산은, 눈이 쌓여, 아직도 흰 옷을 벗지 못하였고

응달진 동네는 매운 바람이 그저 부는지, 밖에 나온 사람이라고는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니다.

복희야, 네 오라비 말이 옳구나.”

할아버지, 참 그래요.”

복희는 오빠에게도 항복이나 하는 듯이 방끗 웃어 보였니다.

할아버지는 온 얼굴에 주름살을 지어 가면서 웃으셨니다.

, 밭을 갈아야겠다.”

할아버지께서는 괭이를 가지시고 앞 밭을 파기 시작하셨니다

할아버지께서는 한 평생(平生)을 땅과 친하신 분이라, 잠간 동안에 한 고랑을 파셨니다.

할아버지, 저희들이 할게요.”

수동이와 복희도, 괭이로 기름진 땅을 파헤쳤니다

늙으신 할아버지와 어린 남매 세 식구가 밭가는 광경(光景), 한 폭 그림과도 같이 아름답고 씩씩하게 보였니다.

세 식구의 땀방울이 어린 얼굴에는, 멀지 않아서 이 밭에, 감자, 고구마, 일년감, 옥수수를 심을 기쁨으로 가득 찼니다.

봄이 먼저 찾아온 수동이 집은, 이제 멀지 않아서 가지각색 꽃들이 다투어 피겠고

강남(江南) 갔던 제비들도 다시 돌아오겠지요.

 

Emotion Icon

 

 

문장이 어쩜 이렇게 단정하고 아름다울까요. 원래는 일부분만 옮기려다, 작은 에세이 하나를 다 옮겨버렸습니다. 마음이 깨끗해지는 느낌입니다. 그나저나 50년대 교과서의 주인공은 철수와 영희가 아닌, 수동이와 복희네요! 뭔가 참신한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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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는 또 얼마나 사랑스럽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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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부분의 사랑스러움이 뒤로 가면서 조금 험악(!)해지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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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막 끝난 시기에 박은이 책은 유네스코와 운끄라에서 인쇄 기계의 기증을 받아 국정 교과서 인쇄전속공장에서 박았다고 하네요. 유네스코는 알겠는데... 운끄라는 무엇?

 

운끄라로 구글링을 해보니 운크라로 수정 검색해주네요. ‘운크라는 바로 유엔한국재건단 (UNKRA, United Nations Korean Reconstruction Agency)! 1950121일 유엔 총회에서 대한민국의 재건을 위해 설립된 유엔 기구로, 1953년 휴전 이후 재건 사업을 진행해 피난민과 집 없는 사람들을 구호하는 일에 주력했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이 교과서의 화룡정점은 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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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 뒷표지에 붙어 있던 학생증이었습니다. 3학년 4반 권O자 학생. 단기 4273년에 태어났으니 1940년생인 이 학생은 지금쯤 팔순이 넘은 할머니가 되셨겠네요. 이 학생증을 증명해주는 이의 이름으로, ‘안동여자중고등학교장의 이름이 적혀있는 걸 보니, 이 학생은 중학교 때까지 초등학교 5학년 교과서를 간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추측해봅니다. 어떤 경로로 여기 서울책보고까지 이 50년대의 교과서는 흘러들어왔을까요?

 

이 소중한 국어책을 여러분께 소개하며 제 마음도 봄날 훈풍 불어오듯 따스해집니다. 서울책보고 시대전 서가에 모아둔 1950년대~1970년대 교과서 보시러 서울책보고 봄나들이 한 번 오시죠!

 

 

 

 

 

 

섬네일 사진 : 1953년 전쟁 중인 서울 거리의 전시 학교에서 공부하는 아이들
출처 : 중앙선데이(사진제공 박대헌 완주 책박물관 관장) https://www.joongang.co.kr/article/17766319#home